[박성완 칼럼] 메르켈의 유산과 한국 정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시대가 막을 내린다. 16년 만이다. 독일에선 메르켈 후임을 정하게 될 연방 하원의원 총선거가 치러졌다. 압도적 다수당이 없어 1위 사회민주당(SPD)과 2위 기독민주(CDU)·기독사회(CSU)연합 가운데 녹색당과 자유민주당을 끌어들여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당이 후임 총리를 내게 된다.

CDU 소속인 메르켈은 2005년 독일 역사상 첫 여성이자 첫 동독 출신 총리가 됐고, 네 번 연임했다. 동·서독 통일을 이뤄낸 헬무트 콜 전 총리와 함께 독일 최장수 총리로 기록된다. 전후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스스로 퇴임하는 총리이기도 하다. 물러나는 순간까지 독일 국민들로부터 70%가 넘는 지지를 받고 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 대부분이 불행하거나 존경받지 못하는 처지라는 점에서, 국민 대다수가 아쉬워하며 떠나보내는 지도자를 가진 독일이 부럽기도 하다.

메르켈 총리는 ‘무티(엄마)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정치노선과 상관없이 포용적인 리더십을 보여줬다. 갈등이 있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설득과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의사결정이 느리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이 같은 끈기를 바탕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 시리아 난민 사태, 코로나 대유행까지 온갖 위기에 성공적으로 대처해왔다. 10년 연속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트럼프, 푸틴과 같은 ‘스트롱맨’ 틈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메르켈의 정치적 유산(legacy)에 대한 평가 중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띈 것은 매슈 크보트럽 영국 코벤트리대 교수가 BBC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앙겔라 메르켈: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의 저자인 그는 메르켈 총리가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으로 가득찬 남성들의 모임’과 같았던 독일 정치를 정책 중심으로 바꿨다고 진단했다. 물리학자로서 정치에 대한 접근법도 매우 사실 기반적이었으며, 정치가 양극단으로 흘러갈 때면 문제에서 ‘정치적 요소’를 제거해 이를 완화시켰다고 했다.

문제 해결에서 정치적 요소를 제거하는 접근법이란 얘기를 들으니, 매사 정치적 요소를 앞세우는 우리 정치판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선거를 5개월여 앞둔 지금 온 나라가 여야 유력 대선주자들이 거론되는 ‘고발 사주’ 의혹과 ‘대장동 개발특혜’ 의혹으로 시끄럽다. 분명 ‘진실(truth)’이 있을텐데, 조각조각 ‘사실(fact)’들만 쏟아진다. 고발사주 의혹은 대장동 뉴스에 밀리는 듯하고, 대장동은 국민에게 허탈감을 안기는 숨은 사실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대장동의 경우 엄청난 개발수익이 부동산값 급등 때문이라 치더라도, 이 사업을 주도한 화천대유에 왜 전직 대법관, 검찰총장, 특검, 검사장 등 거물급 법률고문단이 필요했는지 등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너무 많다. 아무리 화천대유 대주주가 “좋아하던 형님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빈틈없는 수사를 통해 전모가 밝혀지는 것이다. 의혹해소 과정에 정치적 계산이 끼어들면 불신만 커진다. LH 사태 때는 여당이 ‘특검 카드’를 던지고 야당이 검찰수사를 주장했는데, 이번엔 그 반대다. 하나부터 열까지 상식적이라기보다 정략적이다.

내년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메르켈식 포용과 화합의 정치를 기대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 구도로는 어느 쪽이든 스트롱맨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무조건 여당을 지지하거나, 어떤 일이 있어도 정권교체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아무리 세상 시끄러운 일이 벌어져도 표심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막판까지 지켜보고 ‘차악(次惡)’을 선택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미래 비전과 정책 대결이 실종돼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런 마당이라면 후보 검증 차원에서라도 모든 의혹 해소가 급선무다. 누구에게 플러스이고 마이너스일지는 아직 예단하기 힘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