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회사인 미국 인텔이 300억달러(약 34조원)의 거금을 베팅해 ‘글로벌파운드리’ 인수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선언한 지 불과 넉 달 만에 발 빠르게 ‘메가 딜’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반도체 제국’의 이런 파격 행보는 글로벌 반도체 대전(大戰)이 얼마나 격렬하고 빠르게 전개되는지 새삼 일깨워준다.

인텔이 지난 3월 200억달러(약 23조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관망 분위기가 컸다. 그 정도 투자로는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없는 탓에 파괴력이 크지 않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런데 시장 점유율 7%의 4위 업체 글로벌파운드리를 인수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AMD, 퀄컴, 브로드컴, NXP 등 주요 팹리스(반도체설계 전문업체) 150곳을 일거에 고객으로 확보하게 돼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시장은 단박에 요동칠 수밖에 없다.

이는 시스템반도체 분야 세계 1위 등극을 선언한 삼성전자, 파운드리 생태계 육성을 본격화하고 있는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에 커다란 위협이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1위인 대만 TSMC를 추월하겠다고 2년 전 선언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파운드리 점유율은 17%로 여전히 TSMC(55%)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파운드리시장 행보는 TSMC가 오히려 더 활발하다. TSMC는 향후 3년간 1000억달러를 퍼부어 독주체제를 굳히겠다며 미국 일본 유럽에서 공장 증설을 검토 중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사법 리스크에 따른 총수 부재 상황이 이어져 20조원 규모의 미국 공장 증설 결정마저 늦어지고 있다. 인텔이 메가 딜로 승부수를 던진 것과 달리 2017년 이후 1조원이 넘는 인수합병(M&A)도 전무하다.

가열되는 반도체 대전은 국가 대항전을 방불케 한다. 인텔은 “반도체 투자가 인프라이자 일자리 계획의 핵심”이라며 독려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든든한 뒷배다. 유럽연합(EU)도 2030년까지 1345억유로(약 180조원)를 투입해 세계 반도체 생산의 20%가 유럽 안에서 이뤄지도록 한다는 계획을 밀고 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섬나라 대만도 정부의 전폭 지원으로 ‘팹리스 절대 강국’이 됐다. 한국만 엉거주춤하고 있다. 정부는 기업이 ‘개인기’로 키워놓은 반도체 신화를 병풍처럼 앞세워 생색만 낼 뿐 지원은 미미하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라며 샴페인만 터뜨리다가는 10년도 못 가 땅을 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