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政經협력'으로 국가전략 다시 짜라
“‘정경분리’가 가능한가.” 한국의 전직 경제관료가 던진 물음에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냉엄한 국제 정세를 보면 ‘정경분리’는 순진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을 가했을 때 한국은 “안보를 경제와 연계하는 게 말이 되냐”고 비판했다. 통할 리 없었다. 공산주의 체제 탓이라고만 하기 어렵다. 세상이 ‘안보’와 ‘경제’를 묶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는 정경분리가 더는 먹히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일본이 빼든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도 ‘정경협력’으로 나왔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정부는 정부, 기업은 기업” 등으로 적당히 둘러대며 넘어왔다. 전략 없는 전략이 국가전략일 수 없다.

한국은 중국의 사드 보복 때 미·중 충돌을 내다보고 정파를 초월한 국가전략을 짜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손보기를 본격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실행에 옮겼을 때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나선 적이 있었다. 안보와 경제를 연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가나 했더니, 엉뚱하게도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논란만 키우고 말았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손보기를 계속하는 것은 이것이 정파를 초월한 미국의 전략임을 보여준다.

북한이 도발할 때나 열리는 한국 NSC와 달리 미국 NSC는 안보 개념을 바꿔왔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는 경제정책에서 역할을 강화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엔 국제경제로 눈을 돌렸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선 경제 등 복합 안보 위협을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손보기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바이든 행정부도 같은 맥락에서 NSC에 신기술 담당 고위직을 신설했다. ‘기술’과 ‘기업’이 곧 ‘안보자산’이란 얘기다. 안보는 통상전략 위에 있다. 삼성전자를 불러들인 ‘백악관 반도체 화상회의’ 주재자도 NSC 보좌관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책상 위에 올라간다는, 정보기관이 총출동한 국가정보위원회(NIC) ‘글로벌 트렌드’ 보고서가 안보와 경제·기술을 연계한 지 이미 오래다. 안보가 복합개념으로 가고 있다는 건, 대통령과 의회에 인공지능(AI) 활용을 검토·건의하는 AI국가안보위원회(NSCAI)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 AI 시대 미국의 안보와 기술 승리 전략이다. AI 시대 승자가 되려면 연관기술인 반도체, 5G(5세대), 퀀텀에서도 중국에 꼭 이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반도체는 기술·산업을 넘어 안보의 핵심 인프라라는 것이다.

대만 TSMC가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더 짓겠다고 발표한 게 기업만의 결정으로 볼 사람은 없다. 정부와 깊숙이 논의한, 국가 생존 전략까지 다 고려한 정경협력의 산물일 것이다. 이런 쪽의 원조가 일본이다. 일본 도요타는 미국에 자동차 공장을 세울 때마다 주(州) 전체에 알린다. 주지사는 물론 연방 상·하원의원이 일본 도요타를 찾아온다. 온 김에 일본 정계 인사도 두루 만난다. 기업이 공장 하나 세우는 걸 놓고도 정경협력으로 국익을 높이는 국가전략이 가동되는 게 일본이다.

일본과 대만은 미·중 충돌이 길어질 것으로 보고 미국·유럽에서 중국이 빠진 공간을 치고 들어갈 국가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이 미·중 충돌 속에 미국·인도·호주를 잇는 중국 포위 안보라인에 동참했을 땐 치밀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물밑에서 AI 시대를 이끌 미·일 분업, 어쩌면 우주 시대에 대응한 미·일 협력까지도 말이다.

한국은 미국 안보전략하에서 성장도 하고 반도체도 키웠지만 어느새 잊어버린 듯하다. 미·중 충돌 장기화 속에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지도 그렇다. 싫든 좋든 공통의 과제에 직면한 일본과 지혜를 나눌 만도 하지만 그런 실용주의도 없다. 국가전략의 절박성으로 치면 한국은 지구상 그 어느 나라보다 더하다. 당장 NSC를 안보와 경제, 기술을 연계하는 전략체로 개편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정경협력의 새 틀을 짜야 하는 것 아닌가. 전략적이라지만 전혀 전략적이지 않은 ‘전략적 모호성’으로 가다가는 국가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