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개와 늑대의 시간'에 관한 진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 속담이다. 황혼녘 저기 보이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아리송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이를 ‘선거’로 해석한 정치학자도 있었다. 권력을 잡기 전에는 개인지 늑대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 정치인들의 생태를 비유한 것이다. ‘정치’란 몰입하자니 인생이 아깝고, 외면하자니 세상이 망가지는 모순 안에 놓여 있다.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힘든 게 정치인들만은 아니듯이.

영화감독에게 영화를 못 만들게 하는 건 간단하다. 가둬놓으면, 영화감독은 영화를 찍지 못한다. 소설가에게 소설을 못 쓰게 하는 건 조금 더 어렵다. 가둬놓고, 필기구를 없애야 한다. 시인의 경우는 어떨까? 감옥 독방에 갇힌 뒤 펜을 빼앗긴 시인은, 칫솔을 부러뜨려 그 끝을 간 다음 우유갑에 꾹꾹 눌러서 시를 쓴다. 그 시는 면회 온 지인을 통해 몰래 세상으로 널리 퍼진다. 칫솔은 손톱이, 우유갑은 운동시간에 교도소 담장 밑에서 주운 나뭇잎이 대신할 수도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일원으로 9년3개월 동안 감방에 있었던 시인 김남주가 그런 식이었다.

만약 시인에게서 칫솔과 우유갑과 손톱과 나뭇잎까지 빼앗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자신이 그곳에서 쓴 시 수백 편을 통째로 외워버린다. 그 시들은 그가 살아서 세상으로 나가게 된 날 더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공산치하에서 14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가 그런 식이었다. 이런 일들이 두려워 그런 시인을 아예 죽여 버린다면? 그는 ‘전설’이 돼 영원히 진압이 불가능한 저항의 상징으로 불타오를 것이다.

착해 보이는 사회주의 정책들이 재앙을 부르는 것처럼, 화려한 옷차림이 암덩이투성이의 알몸으로 드러나는 비유는 흔한 현실이다. 복잡하고 번잡해 각광받는 것들은 디지털처럼 고장이 잘 나고 검열당하기가 쉬워 선동당하고 조종된다. 검열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아날로그의 끝판왕인 시와 시인의 비유가 이 시대 우리에게 낯선 깨달음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권력자에게 검열당하는 국가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 그리고,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대중에게 검열당하는 국가는 절망적이다. 그런데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다른 지식인이나 예술가에게 검열당하는 국가는 ‘절망’이니, 이 사회가 그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우리가 정치적인 견해로 인해 선동당한다고 착각한 채 이 질병의 근본원인을 해결하지 못한다. 욕심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이 사기를 당하는 것처럼, 외롭고 불안한 이가 증오하면서 위로받고 선동당해서 행복해한다.

잘못된 지식이 죄를 짓게 하고 속이 허한 사람이 맹목 맹종한다. 지성과 인간성 같은 허상은 믿지 마라. 우리는 다 그저 그런 사람들일 뿐이다. 이런 전제가 민주제도와 법질서의 본령인 것이고, 아날로그의 고요한 힘, 실존의 견고함을 회복하는 것은 이 사회의 심리만이 아니라 정치를 구원하는 기본이 된다. ‘더러운 돼지’ 같은 선동꾼에게 당신의 자유를, 인생을, 돈과 명예를 상납하지 마라. 그들을 박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매력적인 악당이 아니라 추한 양아치임을 환히 밝혀 보이는 것이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나오는 말처럼, ‘똥에는 사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사기꾼과 절도범에게 사상범 행세를 하게 해선 안 된다. 똥은 똥일 뿐이다. 그것만 알고, 또 알게 하면 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우리에게 황혼녘이 아니다. 횃불을 들고 가서 저게 뭔지 비춰봐야 할 캄캄한 밤이다. 이윽고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개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우글거리는, ‘돼지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저 돼지들이 가지고 노는 개인가. 두려워하는 늑대인가. 이 고통스러운 질문이, 이 사회 이 나라의 ‘개와 늑대의 시간’에 관한 진실일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경멸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