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국민연금이 헤지펀드인가
“LG화학의 배터리 투자 확대가 재무구조에 부담이 돼 신용등급이 떨어졌다. 신설 배터리 독립법인은 다양한 자금 조달 방안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물적 분할은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다.”(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기구 ISS)

LG화학은 지난달 30일 주주총회를 열고 물적 분할(배터리사업 분할) 안건을 통과(찬성률 82.3%)시켰다. 주총을 사흘 앞두고 2대 주주인 국민연금(10.28%)이 반대의견을 밝혔지만, 대다수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들은 LG화학 손을 들어줬다.

ISS와 함께 세계 양대 의결권 자문기구로 불리는 글래스루이스,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을 맡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 등이 ‘찬성’ 권고를 한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들은 LG화학이 물적 분할을 한 뒤 신규 투자금을 유치하면 재무구조 개선과 신규 성장 동력 확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국민연금의 판단은 달랐다. “분할 계획의 취지에는 공감하나 지분가치 희석 등 주주가치 훼손 우려가 있다”고 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 위원들 대부분은 물적 분할이 중장기적으로 LG화학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에는 공감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중장기적인 안목보다는 개인투자자의 반발 등 단기적인 관점에서 사안을 판단했다는 얘기다.

국민연금의 논리대로라면 기업들은 앞으로 물적 분할을 통한 기업공개(IPO)는 추진하지 말고 차입이나 회사채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LG화학의 배터리 수주잔량은 150조원 규모로, 현재 120GWh 규모인 설비를 3년 내 260GWh로 늘려야 하는 상황이다. 대규모 투자 유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투자 유치에는 주주 구성이 복잡한 인적 분할보다 물적 분할이 유리하다. 인적 분할을 할 경우 자금 유치 방식이 유상증자와 회사채 발행으로 제한된다. LG화학이 발표한 향후 4년간 투자예상금액 10조원 중 5조원을 회사채로 조달할 경우 이 회사 전지사업부문의 부채비율은 72%에서 156%로 높아진다. 신용하락이 불 보듯 뻔하고, 추가 자금조달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LG화학의 투자액은 2017년 2조4000억원에서 지난해 6조9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제2의 반도체’로 불리는 배터리 사업은 대규모 투자 없이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힘들다. 지금은 세계 1위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LG화학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CATL에 밀려나 있었다.

기업들은 이번 LG화학 물적 분할 주총을 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하소연한다. 국민연금의 ‘경영개입’이 갈수록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정부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에 이어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으로 국민연금의 경영개입 문을 활짝 열어줬다. 국민연금이 상장사의 이사 해임·정관 변경 요구를 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도 제정했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국민연금의 경영참여 강화로 일관성 있게 가고 있다.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대주주 의결권 3% 제한이 현실화하면 ‘국민연금을 통한 관치’가 사실상 합법화될 것이라는 걱정도 많다.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개입해 신성장동력 육성 계획의 발목을 잡는 건 무책임한 처사다. 국민연금 수탁위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최저임금심의위원회처럼 노사정 추천 인사 등의 ‘나눠먹기식’으로 구성돼 있다. 기업 이사진은 배임 등 각종 법적 처벌을 감수하고 의사결정을 하지만, 수탁위는 결정만 내릴 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국민연금이 기업의 경영활동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의사결정 시스템부터 개혁하는 게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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