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다시 돌아보는 노태우·이명박 시절
노태우,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87 체제’ 이후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1, 2위를 다툴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물태우’ 소리를 들었고, MB는 ‘2MB(메가바이트)’ ‘쥐박이’ 등 좌파진영의 조롱 대상이었다. 재임 때나 퇴임 후 곤경에 처했을 때나 ‘열혈 빠(추종자)’도, 콘크리트 지지층도 변변히 없었다. 국민에게는 별 볼 일 없고, 카리스마도 없는 그저 그런 전직 대통령들로 기억된다.

하지만 실상보다 너무 저평가됐다는 학계의 반론도 있다. 노태우 정권은 공산권 붕괴와 격변하는 탈냉전 질서 속에 나라 안팎이 극도로 불안정한 대(大)전환기에 출범했다. 그럼에도 북방정책으로 활로를 열고, 대북관계를 개선한 점은 인정해줄 만하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분출하는 각계각층의 욕구에 대해 군(軍) 출신이면서도 우유부단할 정도의 ‘연성 리더십’으로 일관해 강경 권위주의로의 복귀 가능성을 없앴다.(강원택 편저 《노태우 시대의 재인식》)

MB에 대해서도 다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취임 초 광우병 파동에 마냥 후퇴해 좌파는 물론 우파도 비난할 만큼 출발이 험난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미국 중국과의 통화스와프 등 신속·과감한 대처로 주요국 중 가장 먼저 위기에서 벗어났다. 또 G20을 주도하며 국제 외교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이 한껏 올랐던 것도 이 시기다. 해마다 총리를 갈아치우던 당시 일본에선 “MB를 수입하고 싶다”는 말까지 나왔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인기 없어도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태우 시절엔 인천국제공항, KTX 등을 구상해 실행에 옮겼다. 이런 국책사업을 그때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떨까 상상해 보면 선견지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의 전 국민 확대도 그 시절이었다. MB의 ‘4대강 사업’은 극심한 정치적 논란을 낳았지만, 그 뒤 심각한 홍수와 가뭄이 수그러든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집값 폭등도 노태우 시절 200만 호 건설로, MB 때는 뉴타운 개발과 규제 완화로 잠재웠다.

물론 그들의 과(過)를 따지면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굳이 그 시절을 반추하는 것은 그들의 재임 시기가 지금 상황과 여러모로 대비되는 절체절명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자국우선주의, 미·중 갈등에다 코로나 충격까지 겹쳐 어디를 향해 가는지조차 알 수 없는 대전환기다. 대내적으로도 저성장과 저출산·고령화가 상수가 됐고, 두텁던 중산층이 갈수록 홀쭉해진다. 기득권 이익집단의 발호와 정치 포퓰리즘 홍수에 온 나라가 휩쓸려 떠내려갈 판이다.

과감한 규제혁파와 노동개혁 없이는 한국의 미래 행선지가 남유럽 또는 중남미 어디쯤이 될 게 뻔하다. 누구나 알지만 자신은 예외로 여긴다. 오히려 국익 대신 정파이익, 정책 대신 정치, 진실 대신 진영논리가 지배한 지 오래다. 유권자의 세금을 털어 측근과 핵심지지층의 지갑을 채워주는 ‘클렙토크라시(도둑정치)’, 특정 정당에 집단지지를 약속하고 특권을 부여받는 ‘블록투표’가 뉴노멀이 돼간다. 지난 1년 새 조국·윤미향 사태를 거치며 한국인의 가치관은 공정과 정의, 합리와 윤리의 아노미(혼돈) 상태다.

정말 이렇게 허송해도 될 때인가. 집권 4년차 문재인 정부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등 공약마다 무수한 폐허를 남긴 채 ‘부동산 악순환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간의 경제활력은 실종된 대신 공공부문과 노동계만 여전히 호황이다. 176석 거대 여당은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고, 이른바 검찰개혁은 왜 하는지조차 혼란스러워졌다. ‘주류 교체’로 집권세력만 바뀌었을 뿐 구조적 문제는 하나도 고친 것도, 고칠 생각도 없는 듯하다.

알렉시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일관되게 견지한 교훈은 ‘민주주의는 혁명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촛불로 대통령을 끌어내린 나라의 국민이 이제는 신발을 던지고 있다.

이대로는 나라의 10년, 20년 뒤 모습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다. ‘압축성장’이 가능했던 만큼 ‘압축후퇴’하지 말란 법도 없다. 이 시대의 소명은 무엇인가. 미래세대가 추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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