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엉터리 작명정치, 더는 안 된다
작명(作名)의 힘은 엄청나다. 똑같은 사람, 사물, 현상을 놓고도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진다. 헌법재판소의 ‘대체복무 허용’ 판결 이후 표현 적정성 논쟁이 불거진 ‘양심적 병역거부’가 그런 예다. 징병거부가 ‘양심적’이라면 군복무자는 ‘비양심적’이란 말이냐는 문제제기가 잇따랐다. 병역거부 당사자와 옹호세력이 붙인 ‘양심적’이라는 수식어를 헌법재판소가 판결문에서까지 사용하면서 논란이 폭발했다. 국방부가 부랴부랴 ‘양심적 병역거부’ 대신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찬반이 팽팽하게 맞서는 이슈일수록 승패를 가르는 데 ‘작명’이 큰 역할을 한다. 복잡한 이슈를 그럴듯하게 요약하거나 비유적으로 표현한 용어를 동원해 더 많은 지지를 확보한 쪽이 유리해진다. 박근혜 정부 시절 마련한 고용 관련 행정지침이 오래 못 가고 폐기된 데는 ‘작명전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고용노동부가 기업에 현저한 저성과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행정지침을 발표하자 노동계가 즉각 반발했다. 이때 내건 구호가 ‘쉬운 해고’ 반대였는데, 취업 기득권자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데 재미를 봤다.

정부 지침의 앞뒤를 잘라버린 ‘쉬운 해고’ 프레임은 우리 사회에 두고두고 반추해야 할 숙제를 남겼다. 정부 지침은 ‘업무 능력이 현저히 낮거나 근무 성적이 부진해 주변 동료 근로자에게 부담이 되는 경우’ 교육훈련을 통해 다른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주고, 그래도 개선이 없으면 배치전환 등으로 재도전 기회를 주며, 이렇게까지 해고 회피 노력을 했는데도 태도 변화가 없을 경우에 한해 해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이런 지침을 마련한 것은 취업 기득권자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고용노동시스템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서였다. 청년들의 취업 기회가 갈수록 줄어들고,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이 때마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제로 노동경직성을 꼽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미국 등은 물론 연공서열과 종신고용 문화가 가장 뿌리 깊었던 일본조차 저성과자 해고 등 고용유연화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진행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이런 현실에 눈감은 채 ‘쉬운 해고 반대’로 상황을 호도한 대가는 구직난에 신음하는 청년세대가 호되게 치르고 있다. 갈수록 뚜렷해지는 저성장 기조 속에서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세대 간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사업장 안전 사고를 막기 위한 조치를 ‘위험의 외주화’ 관점에서 논의한 것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 정부와 국회는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작업장 사고가 잇따르자 사업주가 위험직종 종사자를 직고용하도록 의무화하는 ‘산업안전법’을 마련했다. 이 법은 그러나 작업장 안전이 고용형태나 외주화 여부가 아니라 엄격한 안전관리 유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위험의 외주화’ 금지가 아니라 ‘위험관리의 전문화’라는 관점에서 안전사고 방지책을 모색해야 지속가능한 대책이 나올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안전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역량을 갖춘 업체와 유자격 전문직이 종사하는 고임금 직종으로 개선할 수 있다. 사업자와 종사자 모두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이 해법을 ‘위험의 외주화’라는 경솔한 관점이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장 목소리에 귀 막은 채 엉뚱한 조치로 상황을 악화시켜 온 집권당이 요즘 또다시 엉터리 같은 ‘작명정치’에 나섰다. 상시국회를 제도화하고 국회의원들의 출결 현황을 공개하기로 하는 등의 국회법 개정안을 ‘일하는 국회법’이라며 밀어붙이고 있다. 35조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추가경정예산안을 야당도 배제한 채 날림으로 통과시킨 여당이 말하는 ‘일하는 국회’가 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국회가 일하지 않아서 국정이 수렁에 빠진 게 아니다. 재정 부담을 감안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통과시킨 포퓰리즘 법안과 특정 이해집단에 포획돼 규제법안을 남발해 온 게 국회의 적폐로 지적되는 터다. 민의를 온전하게 수렴해 법을 제정하고 행정부를 견제하며 재정을 감시하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제대로 일하는 국회법’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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