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여전한 증권가의 위기 불감증
2년 전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이 취임했을 때 코스피지수는 2500선을 넘나들었다. 지루했던 ‘박스피’ 장세 5년을 탈출한 증시가 21% 뛴 이듬해였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분위기 속에 정 사장은 직원들에게 의외의 지시를 내렸다. 한창 인기 있던 주가연계증권(ELS) 잔액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개별 종목 주가나 지수가 일정 범위에서 움직이면 3~6개월 만에 약속한 수익을 돌려주는 ELS는 단기 자금을 굴리는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상품이다. 증권사는 가입자에게 상환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초자산 선물을 사고파는 헤지(위험회피) 거래를 한다. 헤지는 판매 증권사가 직접 하거나 다른 증권사(주로 외국계 회사)와 계약을 맺고 위험을 넘기는(백투백) 방식으로 이뤄진다. 헤지를 직접 하면 거래 과정에서 생기는 수익까지 챙길 수 있지만 시장이 예상과 달리 움직일 경우 손실도 떠안아야 한다. 통상 자체 헤지형 ELS는 잔액의 1.5% 안팎을 증권사가 수익으로 챙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투백은 판매사 몫이 그 절반에도 못 미친다.

물 들어올 때 더 조심해라

정 사장이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건 자체 헤지였다. 그는 “자기자본 5조원 회사가 직접 헤지하는 상품이 4조원 가까이 된다면 문제라고 판단했다”며 “사장이야 재임 기간만 별 탈 없이 지나가면 되겠지만 사업을 영속적으로 이어가야 할 회사 차원에서 보면 위험 관리가 필요했다”고 회상했다. ELS 규모를 줄이는 대신 기업공개(IPO), 대체투자 등 자신의 전공인 투자은행(IB) 부문을 강화하겠다는 복안도 있었다. 올해 3월 말 이 회사의 직접 헤지 잔액은 1조5000억원대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코로나 쇼크’가 글로벌 증시를 강타했다. 자체 헤지 물량이 수조원대에 달하는 일부 증권사는 지난 3월 말 이후 갑작스런 유동성 위기로 패닉에 빠졌다. 기초자산으로 인기가 높았던 유로스톡스50지수가 급락하면서 마진콜(추가증거금 납부 요구)에 대응할 자금이 일시적으로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자체 발행한 기업어음(CP)을 받아줄 곳이 없자 한국은행에까지 손을 내밀어 부랴부랴 급한 불을 껐다. 2년 전부터 위험을 관리해온 NH투자증권은 그나마 충격이 덜했다. 정 사장은 “작년 한때 대형 증권사 중에서 ELS 실적이 꼴찌로 떨어져 직원들로부터 원성을 듣기도 했다”며 “그렇다고 해도 금융회사 경영을 ‘물 떠놓고 하늘에 기도하는 식’으로 할 수는 없지 않냐”고 반문했다.

위험관리 재점검 계기 삼아야

ELS 자체 헤지로 증권업계가 곤욕을 치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기업 계열의 한 증권사는 2015년 당시 기초자산으로 유행했던 홍콩H지수가 반토막 나는 바람에 9개월 새 1600억원을 날렸다. 직전 연도 이 회사 영업이익(221억원)의 7배가 넘는 손실이었다. 신용등급 강등으로 자금조달 비용이 치솟자 계열사를 동원해 두 차례 유상증자를 하고 본사 건물까지 팔아야 했다. 이 증권사가 원래 신용등급을 되찾는 데는 꼬박 3년이 걸렸다.

지난달 단기자금 시장이 경색되자 여러 대책을 내놨던 금융당국이 증권업계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증권맨들이 ‘물 들어올 때’ 수억원대 성과급을 챙기면서도 정작 리스크 관리에는 소홀했던 민낯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휘청거릴 때 아빠가 한 번은 잡아줄 수 있어도, 실수가 되풀이되면 그냥 넘어지게 놔둘지도 모른다. 그렇게 배운 실력이라야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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