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가권력의 근본은 애국심이다
2014년 영화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고독한 리더십과 조선의 위난 극복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명량대첩의 요체는 조선 수군과 백성이 ‘죽고자 하면 산다(必死則生)’는 이순신의 철학으로 인화(人和)를 이룬 데 있었다. 그 인화의 힘은 조선이 전선(戰船) 12척밖에 남지 않은 최악의 조건에서 약 30배 우위의 왜군을 물리치는 쾌거로 나타났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자신의 집무실이자 회의실이었던 운주당(運籌堂)에서 밤낮으로 장수들과 의논하고 졸병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였다고 기록했다. 이런 소통과 협동의 리더십으로 그는 전장 상황을 통찰하고 뛰어난 예지와 용기를 발휘해 싸우면 이기는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때때로 역사적 가정은 과거 사실을 논증하고 교훈을 얻는 데 유익하다. 임진왜란 때 명재상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전쟁에서 패해 망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전쟁 때 국방개혁을 지휘했던 프로이센의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가 수제자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를 중용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독일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례의 공통적 교훈은 정치적·이념적 입장을 초월해 애국심을 기준으로 비범한 인재를 등용해야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동인과 서인,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려 권력 투쟁을 벌였고, 프로이센도 나폴레옹 축출을 전후해 국정의 주도권을 놓고 개혁파와 수구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상황이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은 역사의 진리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능력과 문화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 들어 요직에 배치된 인물의 면면을 보면 하나의 확증 편향성이 드러난다. 우선 자신들이 야당 시절부터 반대해온 국가 정책을 담당했던 실무 관료들은 정무직이 아닌데도 배척한다. 예를 들면, 한·미 정책 업무에 정통한 유능한 인재들이 진급에서 소외되거나 한직으로 밀려난다. 이에 비해 친북·친중 성향이거나 과거 대북(對北) 유화정책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득세하는 형국이다.

최근 ‘조국 사태’에서 보듯이 친문 핵심이거나 특정 정파·학연·지연이 개입하면 사법처리도 면제해주려 든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 동안 내부 사정을 폭로해 정치적 이익을 안겨준 일부 관료는 도덕성·역량과는 별개로 승진 또는 국회 진출을 보장한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 근무했던 사람은 확실한 ‘아군’으로 여긴다. 이런 인사 행태는 국가에 헌신해야 할 공직사회 내부의 건전한 ‘견제와 균형’ 기능을 약화시키고 정치권력의 불법 행위에도 ‘알아서 기는’ 분위기를 조장하고도 남는다. 그 목적은 다름 아닌 친문 패권주의의 외연 확대이며,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의 몫이다. 향후 정권교체 시 필연적으로 벌어질 ‘인사태풍’이 걱정이다.

군 조직 인사도 예외가 아닐뿐더러 문제가 더 심각하다. 기본적으로 군의 ‘개방형’ 인사 관리에 현실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군 지휘관과 참모 직책의 대부분은 민간 인력으로 중간 수혈이 불가하다. 예컨대 전투를 지휘하는 사단장에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우수한 ‘폴리페서(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수)’ 또는 관료라도 보임할 수 없다. 소대장부터 연대장까지 제대별 지휘 경험을 쌓은 인재풀에서 선발해야 한다. 더욱이 국가 정책을 감당할 장군 인재는 희소하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양성된 유능한 인재들이 정치적·이념적 편향 기준 때문에 희생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블랙리스트로서, 유사시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다.

국민이 자유·민주 선거로 선출된 권력에 국정운영 책임을 맡긴 것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뜻에서다. 국민은 어떤 정부에도 권력을 이데올로기화해 특정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데 ‘올인’하라고 허락한 적이 없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인사가 ‘사람이 먼저’라는 국정 철학의 근본 아닌가. 훗날 과연 이 정부가 류성룡처럼 ‘하늘의 도우심’에 감사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본래 있었던 사실 그대로’ 징비(懲毖)할 수 있으려면 국민 편가르기를 당장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