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 맥] 韓·獨 소재·부품 협력, 기회의 창 열어야
“부(富)를 창출하는 힘은 부 자체보다 훨씬 중요하다.” 독일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말이다. 리스트의 유산에 충실한 독일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공공 연구기관, 민간기업, 협회 등 다양한 주체 간 튼튼한 네트워크를 토대로 제조 강국을 일궜다. 프라운호퍼연구소 등 4대 연구소뿐만 아니라 1000개가 넘는 공공지원 연구기관, 다수의 민간 연구개발(R&D)센터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기업의 혁신을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이달 중순 소재·부품 분야에서 실질적인 협력 기회를 모색하자는 생각으로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조 강국인 독일이 우리와 협력할 유인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현지 일정을 시작하며 이런 의문은 오히려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협력의 손을 내밀자 독일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맞잡으며 강한 협력 의지를 보여줬다.

독일 연방경제에너지부 장관은 우리를 전략적 파트너로 누차 언급했다. 소재·부품을 포함한 산업 협력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5분의 1을 담당하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주총리이자 집권당 대표 역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 평가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10월 소재·부품 분야의 협력을 위해 개최했던 ‘한·독 기술협력 세미나’에서도 지멘스, 프라운호퍼 등 독일의 대표 기업과 연구소 등이 발제자로 나섰다. 바스프, 에스에이피(SAP)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대거 참여해 우리나라와의 협력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들 입장에서 왜 한국인가. 독일 연방경제에너지부 장관은 한국이 5G(5세대) 이동통신, 수소경제 등 미래 성장산업의 대표주자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급변하는 산업환경 속에서 소재·부품은 물론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미래차 등 협력할 만한 분야가 많다고 본 것이다. 두 나라가 기업 간 교류, 공동 기술개발, 투자 등을 통해 쌓아온 신뢰 또한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양국은 2014년부터 공동 펀딩을 통한 기술개발을 성공적으로 추진해왔다. 지금까지 총 35개 과제를 수행했다. 평균 경쟁률이 3 대 1 이상을 기록하는 등 두 나라 기업 및 연구소들의 관심이 높다. 첨단 소재 분야에서 우리 기업이 겪던 기술 애로를 독일 파트너들과 공동으로 해결하고 시장을 확대한 사례도 있다.

이번 방문을 통해 독일 연방정부와 장관급 산업협력 협의체 신설에 합의했다. 소재·부품 분야의 공동 R&D 규모를 확대하는 한편 내년부터 소재·부품 과제 비중을 50% 이상으로 늘리기로 했다. 별도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아헨 지역에 ‘한·독 소재·부품 기술협력 센터’를 개소해 양국 기업 간 비즈니스 활성화를 도모할 방침이다. 이 센터를 통해 양국의 혁신적 스타트업 및 벤처기업 간 기술교류를 활성화하고 공동 기술개발, 합작투자, 인수합병(M&A), 제3국 공동진출 등 다양한 협력 모델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민간 차원에서도 전자부품연구원과 프라운호퍼연구소가 소재·부품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우선 디스플레이 쪽에서 공동 R&D를 진행하기로 했다. 한·독 자동차산업협회들은 미래차 분야에서 협력 의향서를 교환했다. 전기차, 자율차 등에서 협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소재·부품 강국이자 제조업 혁신의 선두주자인 독일과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 활짝 열리고 있다.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독일과 소재·부품을 포함한 산업 협력의 물줄기를 크게 키울 때다. 글로벌 기술 트렌드가 급변하고 ‘퍼스트 무버(first mover)’만이 살아남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엔 독일과 같은 세계적인 강국과 전략적 협력을 확대하는 게 필수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속도감 있는 이행과 성과 창출을 통해 한국과 독일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좋은 동반자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