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 맥] 한·아세안 상생 번영, 표준화 공동연구로부터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세계 1위를 지키는 분야가 있다. 양궁이다. 태극 궁사들은 1984년 LA올림픽 이후 메달을 휩쓸어 왔다. 우리의 독주가 이어지자 세계 양궁연맹은 경기 규칙을 여섯 번이나 바꿨다. 명분은 흥미 유발이라지만 새 규칙은 언제나 우리를 견제할 목적으로 제정됐다. 실력으로 극복해 왔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언제 또 규칙이 바뀔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우리 양궁 지도자들이 우군(友軍)이 될 수 있다. 한국식 훈련 기법에 익숙한 그들에게도 규칙 변경은 위협이다.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셈이다.

국제통상에도 규칙이 있다. 표준이다. 전 세계 교역의 80%가 국제표준 영향 아래 이뤄진다. 대다수 국가에서 국제표준은 사실상의 강제력이다. 국제표준은 ISO(국제표준화기구), IEC(국제전기기술위원회) 같은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정한다. 국제표준이 제·개정되면 각국은 국가표준을 이에 맞춰야 한다. 내수와 수출 제품에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건 비효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기술이 국제표준에 반영되면 그만큼 우리 입지가 유리해진다. 국내 기업이 세계 시장을 선점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세계 각국이 국제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하는 이유다.

정부는 지난 6월 ‘4차 산업혁명 시대 국제표준화 선점 전략’을 수립했다. 2023년까지 혁신산업 분야에서 국제표준 300건을 제안해 전체 국제표준의 20%를 선점하는 게 목표다. 올해 이미 70건 이상의 국제표준을 제안했다.

국제표준 제정 과정에서는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대립한다. 더욱이 표준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인류 지식의 공공재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고 국력이 강해도 어느 한 나라의 힘만으로 국제표준화를 진행하기 어렵다. 국가 간 협력이 필수다.

정부는 그동안 세계 각국과 다양한 표준 협력을 추진해왔다. 아세안과는 ‘개도국 표준체계 보급지원 사업’을 통해 우리나라의 표준·인증제도 전수 및 시험소 공동 설립 등을 통해 협력을 이어왔다. ‘동남아지역 표준인증 협력 포럼’ ‘스마트시티 아시아 표준 포럼’ ‘한·아세안 지능형 교통시스템 협력 워크숍’을 열어 미래 표준협력 사업을 발굴하고 있다.

정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는 25~26일로 예정된 부산 특별정상회의 선언문에 ‘한·아세안 표준화 공동연구센터’ 설립 관련 문안을 포함시킬 계획이다. 아세안 일부 회원국, 또 특정 기술 분야만 대상으로 하는 협력을 넘어 포괄적 표준협력 공동체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아세안은 4차 산업혁명을 통해 2030년까지 세계 4위 경제 블록으로 성장한다는 전략 아래 역내 국가 간 표준과 기술 규정의 조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제표준화 선도국으로 도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산업 표준화 경험은 아세안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성장에 필요한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아세안과의 공동 연구는 국제표준화 무대에서 아세안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일인불과이인지(一人不過二人智)라는 말이 있다. ‘혼자서는 두 사람의 지혜를 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국과 아세안은 지혜를 모아 상생을 도모하고자 같은 배에 올라타자는 것이다.

최근 타결된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은 신남방 정책의 본격화를 의미한다. 한·아세안 대화관계 수립 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제안될 ‘한·아세안 표준화 공동연구센터’ 역시 궤를 같이한다. 표준화 공동 연구가 한·아세안 경제 협력의 반석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