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또다시 강조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시작된 지 100일째인 지난 11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부터 정례보고를 받은 자리에서다. 문 대통령은 “세계경제 둔화 등으로 민간부문 활력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재정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완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책무”라며 적극적인 재정 집행을 지시했다. 홍 부총리는 “재정이 최대한 집행되도록 하겠다”고 보고했다.

‘저(低)성장-저물가’로 대변되는 일본식 복합불황 우려마저 나오는 상황에서 재정 정책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재정의 역할은 부진한 민간 투자와 소비를 견인할 ‘마중물’에 그쳐야 한다. 경기 침체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 없이 재정만 늘리면 ‘경기 부양’은커녕 국가채무만 급속히 늘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2017년 하반기부터 급속한 재정확대 정책을 펴왔지만 상황은 참담하다. 경제성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수준으로 고꾸라졌다. 블룸버그가 최근 집계한 41개 주요 금융회사들의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 평균도 지난 7월 2.1%에서 1.9%로 떨어졌다. 고용 상황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고, 상당수 자영업자들은 경영난을 호소하고 있다.

재정건전성도 이미 위험 수위다. 한국의 국가채무는 내년에 800조원을 넘어서고, 2023년엔 1000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2023년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심리적 마지노선’인 40%를 넘어 46.6%까지 올라간다. 1980년대 장기 불황 초기에 재정정책을 남발해 국가 채무비율이 급등한 일본 사례가 더 이상 남의 일만은 아니다.

이런 상황이 빚어진 것은 성장 잠재력을 높일 수 있는 정책보다 선심성 세금뿌리기 정책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2년간 일자리 예산으로 수십조원을 투입했지만 단기 노인 일자리만 늘었다. 청년 수당, 노인 수당 등 ‘복지 퍼주기’도 만연해 있다. 게다가 반(反)기업 정책은 경제 활력을 급속히 위축시키고 있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이 기업 유치를 위해 법인세 인하 경쟁을 벌이는데 우리만 거꾸로 법인세를 올렸다. 산업 안전과 화학물질 관리를 이유로 툭하면 공장을 세우고 기업인을 감옥에 넣을 수 있는 가혹한 규제들도 여전하다.

외부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최근 한국 정부의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급속 인상 등 이른바 ‘진보 정책’이 청년들을 취업난이라는 고통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런데도 정부·여당은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위기 상황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처방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경제에 대한 판단이 시장과 동떨어지다 보니 규제 개혁 등 경제체질을 바꿀 근본 대책보다는 재정을 쏟아붓는 미봉책을 내놓기에 급급한 것 아닌가. 경기 부양 효과는 거의 없고, 재정은 재정대로 거덜 날 판이다. 정부는 더 늦기 전에 헛돈 쓰는 세금 의존 정책을 구조조정해야 한다. 성장 잠재력을 높일 사회 인프라와 연구개발(R&D)을 늘리고, 민간에서 경제 활력이 생겨나도록 반(反)기업 정책도 전면 수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