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형사절차를 통해 달성하려는 건 무엇인가
국가가 제도로 확립된 뒤 사적 복수를 금하고 형벌권을 독점했다. 형사재판은 마치 절대자를 대신해 인간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때 형사재판은 죄 있는 자는 반드시 처벌하고 죄 없는 자는 반드시 방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재판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이며 매우 불완전하다. 재판의 불완전성은 인식의 한계, 기억의 한계, 지식의 한계 등 인간 본성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불가피하다. 여기에 제도로서의 인적·물적 한계까지 겹쳐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재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재판제도는 이런 불완전성을 당연한 전제로 두고 설계됐다.

재판 과정에서 판사의 마음속에 형성되는 유무죄의 확신에 따라 판결이 선고된다.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는 사례를 줄이기 위해 유죄에 필요한 ‘확신의 정도’를 높게 설정하면 실은 죄를 지었음에도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나는 사람이 늘어난다. 반대로 그 정도를 낮추면 이번에는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유죄판결을 받는 사람이 늘어난다. 양방향의 오류는 서로 반비례한다.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판결의 오류를 어느 쪽에 편중시킬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우리는 이 점에 관해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말자’고 합의했다. 그 결과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남아 있는 한 유죄 판결은 불가능하다. 현대의 모든 문명국가가 이런 입장을 취한다. 무죄란 검사가 유죄의 입증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이지, 피고인의 결백이 확인됐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건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빨리 범인을 잡아 엄히 처벌하기를 바란다. 이런 대중의 심리에 터 잡아 정치인과 검찰은 거악을 척결해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한다. 죄지은 자를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정의감은 위험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근본적 합의를 위협한다. 무죄인 자를 유죄로 만드는 방향으로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수사 기관의 의욕은 오히려 정의를 좌절시키기도 한다.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수사 과정에서의 자살은 우리의 형사사법제도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핏빛 경종’이다. 죄가 있으니까 자살하는 것 아니냐는 냉소적 생각은 무책임하다. 무죄 추정이 헌법으로 보장된 사회에서 판결까지 다투어 볼 기회조차 포기하고 자살하는 것이 정상인가.

과거 중국에서 동생이 맡긴 구슬을 형이 도둑맞았다며 돌려주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재판을 맡은 호장유란 이가 다른 도둑을 시켜 형이 장물아비라고 진술시켰다. 조사를 당하게 된 형은 집에 구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물이 아니라 동생이 맡긴 것이라고 자백했다. 재치 있는 재판의 사례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일이 과연 정당한가?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협박하며 엉뚱한 별건으로 압박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사람의 기억은 쉽게 왜곡된다. 듣고 싶은 답이 나올 때까지 밤샘 조사, 반복 조사를 하는 것은 기억의 오류를 일으키며 수사기관의 기획에 따라 재정리된 기억을 피신문자의 뇌리에 주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를 방해하는 ‘증거 오염’이다. 과거에는 피의자 한 명의 사진을 피해자에게 제시하며 범인인지 물었지만 이제는 이런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다. 기억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억울한 기소와 재판은 왜 발생하는가.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의 실수와 능력 부족 외에도 피의자 선정 과정의 불공정성(누구를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열심히 수사할 것인가), 증거에 대한 부적절한 취급(피의자의 결백함을 시사하는 증거 방법은 경시되거나 잘못 다뤄지는 경향), 피의자의 자백에 대한 지나친 의존, 피의자와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증인 진술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해 상충을 유도해 이용하는 수사기법) 등이 지적된다.

형사 절차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되 먼저 올바른 절차를 통해야 한다. 재판제도의 불완전성 때문에 억울하게 처벌받는 사람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데, 재판을 받아보기도 전에 미리 억울한 사람을 양산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