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완의 이슈프리즘] 日 경제보복보다 경계해야 할 것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상무부에 일본의 반도체 덤핑 조사를 명령했다. NEC 히타치 도시바 등 일본 기업이 급성장하며 미국 반도체산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마이크론 등 미국 기업도 덤핑과 특허 소송을 제기하며 가세했다. 당시 일본 외무상이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의 부친 아베 신타로였다. 일본은 미국의 압력을 못 버티고 1986년과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미·일 반도체협정’을 체결했다.

일본 기업은 공정가격 이하로 미국에 반도체 수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20% 이상으로 한다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협정에 담겼다. 후발주자였던 한국 반도체 기업들엔 기회가 됐다. 일본 기업들은 이후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밀려났고, 한국의 삼성전자는 혁신을 거듭해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이 됐다.

한·일 갈등에 미소짓는 중국

2019년, 일본이 한국을 대상으로 경제보복에 나섰다. 아베 일본 총리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문제 삼아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략물자 수출 때 절차를 간소화해주는 국가 명단 ‘화이트리스트’에서도 한국을 빼겠다고 한다.

아베의 경제보복엔 여러 노림수가 엿보인다.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목적이 하나다. 연금 이슈 등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한국을 때려 보수층을 결집하려 한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도 “일본의 수출 규제는 아베가 선거에서 보수민족주의자 표를 얻으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참에 한국 대표 기업들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도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앞장서서 준비하고, 삼성전자의 미래기술 관련 소재를 ‘정밀 타격’한 데서 드러난다. 다음 차례로 자동차 핵심부품을 규제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고조되자 중국이 미소짓고 있다. 중국은 2015년 제조업 강화를 위한 중장기 전략인 ‘중국제조 2025’ 전략을 발표하면서 10%대인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반도체 가치사슬로 엮여 함께 굴러가던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상호 파괴적으로 흘러가면 후발주자인 중국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인재가 핵심…두뇌 유출 막아야

물고 물리는 한·중·일 산업전쟁에서 한시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전투가 있다. ‘병력 확보전’이다. 삼성이 1990년대 다가온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인재’를 최우선으로 강조했고, 일본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일본 문부과학성 산하 한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1976년 이후 40여 년간 일본 기업에서 특허 기술 등록에 이름을 올린 1000여 명의 기술인력이 해외로 이직했는데, 이 중 절반에 가까운 490명이 한국으로 왔다. 이제는 한국행이 주춤해지고 중국으로 많이 간다. 중국 기업들은 2~3배 이상의 연봉을 제시하며 한국에서 인력을 빼가고 있다. 한·일 갈등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도체 경력직원 채용공고도 내고 있다.

지금의 한·일 갈등 상황은 정치·외교적 노력으로 풀어야 한다. 일본에서도 “과거 문제로 미래 가능성을 꺾을 권리는 한국과 일본 그 어떤 정부에도 없다”(하코다 데쓰야 아사히신문 논설위원)며 아베의 수출 규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은 일본의 경제보복이 ‘발등의 불’이다. 합심해서 불을 꺼야 한다. 하지만 긴 미래를 내다보면 인재가 빠져나가는 ‘둑의 구멍’이 더 큰 위협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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