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기업이 자기주식을 사모아 자진 상장폐지를 추진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자진 상장폐지에 필요한 ‘최대 주주 등의 지분율 95% 이상’ 요건을 산정할 때 자기주식을 포함하지 않기로 해서다. 아트라스BX 등 자기주식을 대규모로 취득해 상장 폐지를 추진하려던 기업들의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다.

회삿돈으로 자진 상장폐지 못한다
자기주식 활용한 자진상폐 차단

한국거래소는 28일 자진 상장폐지 때 자기주식을 최대 주주 등의 지분 산정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관련 규정 개정안을 29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상장기업 최대 주주는 회삿돈으로 산 자기주식을 포함해 지분 95% 이상 확보하면 자진 상장폐지를 신청할 수 있었다. 현행 상법상 대주주 지분에 자기주식을 포함하지 못하도록 막는 별도의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대주주 지배 지분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상장폐지를 원하는 최대 주주 상당수가 회삿돈으로 자기주식을 적극적으로 사모은 뒤 △주주총회 특별결의 △공개매수 및 매수확약 등 절차를 밟아 회사를 비상장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번 규정 개정은 최대 주주가 이 같은 방법으로 소수 주주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추진됐다. 그동안 소수 주주들이 기대를 밑도는 가격에 주식을 강제로 팔거나, 상장폐지 이후 회사의 대규모 배당에서 소외되는 사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상법상 95%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지배주주는 5% 미만의 주식을 강제로 취득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6년 사모펀드 IMM프라이빗에쿼티 주도로 이뤄진 태림페이퍼의 상장폐지가 꼽힌다. 대주주인 IMM은 소액 주주의 주식을 주당 3600원에 사들이면서 논란을 키웠다. 소액 주주들은 “가격 산정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고 지난 2월 1심에서 법원은 주당 1만3261원이 적정하다고 판정했다. 태림페이퍼는 지난해 별도 기준 순이익 393억원보다 많은 600억원을 배당했다.

거래소 관계자는 “자기주식 취득 방식의 자진 상장폐지를 제한함으로써 자기주식이 지배주주의 이익 극대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라고 개정 취지를 설명했다.
회삿돈으로 자진 상장폐지 못한다
아트라스BX 등 상폐작업 제동

한국타이어그룹의 계열사 아트라스BX는 수년째 검토해온 자진 상장폐지 추진에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아트라스BX의 최대 주주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는 직접 보유한 31.13% 지분과 아트라스BX가 사모은 자기주식 58.43%를 포함할 경우 89.53%에 해당하는 지분을 갖고 있다. 새 규정에 맞게 상장폐지를 진행하려면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가 아트라스BX의 자기주식을 모두 사들이고 추가로 5% 넘는 지분을 취득해야 한다.

지난 25일 자진 상장폐지를 신청한 알보젠코리아는 가까스로 개정안 적용을 피했다. 2017년 알보젠코리아는 자진 상장폐지를 목적으로 두 차례 공개매수를 진행해 자기주식 9.75%를 포함, 92.22% 지분을 확보했다. ‘일반주주 지분율 10% 이상’ 요건에 미달해 지난해 4월 관리종목으로 지정됐고 결국 올해 상장폐지 대상에 올랐다. 최대 주주 지분 90% 이상으로 1년을 넘긴 경우 자진 상장폐지가 가능하다는 규정을 적용받았다. 알보젠코리아 소수 주주들은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민원을 올리는 등 반발하고 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