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아람코의 행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아람코(ARAMCO)는 1933년 설립된 사우디아라비아의 세계 최대 석유기업이다. 최근 공개된 매출은 약 530조원으로, 사우디 국내총생산(GDP)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작년 영업이익은 삼성 애플 구글의 수익을 합한 것보다 많다고 하니 대단한 기업임에 틀림없다. 한국에서도 에쓰오일 최대주주로 16조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1890년 미국 전체 석유 판매량의 88%를 차지하며 세계 경제를 호령하던 석유왕 록펠러가 설립한 스탠더드오일의 파워를 떠올릴 정도다.

석유는 1900년대 초 중동에서 발견됐는데, 미국과 유럽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원유 채굴권과 생산·판매를 독점하면서 산유국에 돌아가는 혜택은 극히 미미했다. 1970년대 초까지 국제 원유 가격은 배럴당 평균 2달러 수준이었다. 1배럴은 약 159L 정도이니 1L에 1.3센트(약 15원)도 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런데도 소비자는 자동차용 휘발유 값으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 왔다. 생산원가와 최종 소비자가격의 차이가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황금알 수익구조였다. 정부 지분율 일부만 산유국이 갖고 시추, 채굴, 생산, 정제, 수송, 유통, 판매, 서비스 등 모든 과정의 이익은 석유회사, 그것도 소위 ‘세븐 시스터스’라 불리는 석유 재벌이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왜곡된 구조는 거의 70년간 지속됐다. 알카에다 창시자인 오사마 빈라덴의 분노처럼 ‘알라가 무슬림에게 내려준 은총’을 고스란히 서구의 손에 빼앗기고, 자신들은 그들의 상품시장이 돼 정제된 석유제품을 몇십 배의 돈을 주고 사와야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제값을 받으려는 정당한 요구와 석유를 국유화하려는 시도는 석유 재벌과 강대국의 방해로 번번이 무산됐다.

결국 산유국들은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창설, 연대를 통해 석유 이권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초기의 OPEC 결속력은 강대국의 석유시장 독과점 체제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1969년에는 원유 가격이 배럴당 1.29달러로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무모하게 석유 국유화를 시도했던 모사데크 이란 총리는 몇 개월을 못 버티고 정권을 잃어야 했다.

OPEC이 제 목소리를 내기까지는 10여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놀랍게도 도전의 기회는 1969년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의 혁명으로 촉발됐다. 영국 사관학교 재학 때 이드리스 리비아 왕이 영국 정부를 상대로 비굴하고 치욕적으로 석유 이권을 넘기는 장면을 목격한 카다피는 귀국 후 청년장교단과 함께한 9월 혁명을 통해 자원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했다. 여세를 몰아 석유회사들과의 힘겨운 투쟁을 통해 석유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1973년 11월, 4차 중동전쟁을 기점으로 유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여파로 원유 가격이 6개월 사이 4배로 뛰었다. 무엇보다 석유를 무기화하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나라에는 원유 수출을 아예 제한했다. 한국은 당시 친미국가로 분류돼 석유 공급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지면서 역사상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게 됐다. 이것이 제1차 오일쇼크다. 다급했던 한국 정부는 생존을 위해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승인하면서 친아랍정책을 표방했다.

1979년께 세계는 다시 제2차 석유파동에 휘말렸다. 1978년 가을, 이란 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에 이어 1979년 이란 혁명의 여파로 1980년 초에 배럴당 12달러 하던 석유 가격이 몇 차례에 걸쳐 38달러까지 치솟았다. 이후 1981년부터는 유가가 안정세를 보이다가 제3세계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9·11테러, 미국의 이라크 침공,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란 경제제재 등으로 유가는 10년 이상 배럴당 100달러 선을 유지했다.

산유국들은 최고의 호황기를 누렸다. 석유가 발견된 뒤 1세기 만에 이제 아람코 같은 초대형 아랍 석유회사가 세계를 움직이는 상황이 됐다. 아람코의 에너지 최적화를 위한 핵심전략과 ‘2030 사우디 미래비전’의 향방에도 더 많은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