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한국 정치의 '초인적 어리석음'
국회의원을 직접 만나보면 세 번 놀라게 된다. 우선 알려진 것보다 훨씬 스마트하다. 복잡한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임기응변으로 돌파하는 내공이 다들 보통은 넘는다. 대화를 해보면 문제의식도 뚜렷하다. 뭐가 잘못됐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안다. 그렇게 똑똑한 이들이 국회에만 들어가면 필부필부(匹夫匹婦)로 균질화하는 데 또 놀란다.

‘부분의 합=전체’라는 명제는 한국 정치판에선 참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가 부분의 합에 가장 못 미치는 게 여야 정당들이 아닐까 싶다. 3명이든 30명이든 300명이든 모아놓으면 똑같다.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 몰지성’이 작용한다.

정치의 퇴행은 지금 여기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00여 년 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치인들은) 초인적 어리석음을 지녔다”고 썼다. 그 후예들이 현재 브렉시트를 놓고 누가 더 어리석은지 경쟁하고 있다. 역사는 꽤 자주 되풀이된다.

국내 정치판에서 ‘초인적 어리석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정치인들이 경제를 주무를 때마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생산성과 효율의 영역인 경제를 온갖 표(票) 논리로 분탕질해 이익집단들 간의 이종격투기로 만들기 때문이다. ‘카풀 대타협’은 뭘 타협했는지 알 수 없고, 원격진료는 19년째 시범사업만 하게 만드는 식이다.

지난 정부의 정년연장처럼, 국회는 주 52시간 근로제를 대책 없이 입법부터 해놓고 허둥댄다. 임금피크 없이 정년연장을 덜컥 시행했듯이, 주 52시간이란 선물부터 노조에 안겨주고 이제서야 탄력근로니 선택근로니 보완하겠다니 제대로 풀릴 리 없다. 아이들도 제일 화낼 때가 ‘줬다 빼앗는’ 것 아닌가.

정치인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경제원리에 아예 무지하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일자리 대란인데 기업이 지킬 수도 없는 법들을 그토록 쏟아낼 수 있을까 싶다. 이런 정치인들을 법안 발의건수로 평가한다. 16대 국회의 1651건이던 의원입법안이 18대 1만1191건, 20대는 3년 만에 1만7239건에 달한다. 법안 대다수가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될 쓰레기나 다름없다.

그래도 정치인들이 건재한 건 상대방보다 조금만 나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올 오아 낫싱(all or nothing)’인 선거 때면 염치도 눈치도 없다. 여당 대표는 4·3 보궐선거 때 “(자당의) O후보가 당선되면 추경 편성할 때부터 예결위원으로 참여시켜 긴급자금을 많이 가져오도록 보장하겠다”고 유세했을 정도다. 과거 야당시절 대형 SOC사업을 ‘토건·삽질’이라고 맹비난하던 이 정부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와 기준완화를 밀어붙인 것도 내년 총선을 빼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권력이라는 ‘절대반지’ 쟁탈전에 나라 곳곳이 골병들고 있다. 정치가 국가 미래를 위해 ‘누가 잘 하나’가 아니라 ‘누가 덜 못 하나’의 경쟁으로 퇴락해간다. 국부(國富)를 키우는 입법에는 관심 없고, 특정 지역·집단·계층 이익에 부합하는 입법만 무성하다. 정치인에게 이익일수록 나라에 손실이 되는 이유다.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북유럽을 꼽는다. 의원들이 보좌관을 공유하고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모습은 부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겸손·검소의 정치가 자신이 특별하거나 뛰어나다고 여기지 않는 ‘얀테의 법칙(Jante’s Law·보통사람의 법칙)’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함께 봐야 한다. 절대반지를 찾아 헤매는 골룸처럼 권력지향적이고 특권의식으로 군림하는 한국 정치에서 가능하겠나 싶다.

마크 트웨인은 “정치인과 기저귀는 자주 갈아줘야 한다. 이유도 같다”고 했다. 인간은 한 번 쥔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법이 없다. 정치가(statesman)가 아닌 정치꾼(politician)을 솎아내려면 정치가 다 해줄 것이라는 ‘과잉 기대’부터 접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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