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메릴린치'의 쓸쓸한 퇴장
“미국 금융산업 역사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월스트리스저널(WSJ) 등 미국 언론들이 105년 역사의 월스트리트 투자은행(IB) ‘메릴린치(Merrill Lynch)’ 브랜드의 퇴장을 전하면서 내린 평가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IB 부문 등에서 사용해왔던 ‘메릴린치’라는 사명(社名)을 조만간 떼어내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BoA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메릴린치를 인수했다. 이에 따라 한때 세계 최대 증권사이자 미국 3대 IB였던 메릴린치는 BoA 자산운용 브랜드에 ‘메릴(Merrill)’이란 이름으로 흔적만 남게 됐다.

메릴린치는 20세기 금융산업의 혁신 아이콘이었다. 거액 자산가만 상대하던 당시 다른 증권사들과는 달리 소액 투자자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여 1950년대 주식투자 붐을 일으켰다. 사업 보고서를 발간하고 업무에 컴퓨터를 활용한 것도 증권사로는 메릴린치가 세계 최초였다.1977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산관리계좌(CMA)를 선보였다. 2001년에는 예탁 금액별로 금리를 차등화한 승부수로 자산운용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주식 브로커들과의 폭넓은 네트워크도 메릴린치의 강점이었다. 업계에선 ‘선더링 허드(thundering herd)’란 별명으로 통했다. 천둥이 칠 때 한꺼번에 움직이는 소떼라는 뜻이다. 혼란스런 시장에서 빠른 판단과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업계를 선도해서다. 메릴린치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파산하거나 다른 회사로 넘어간 다른 IB들과는 달리 그래도 BoA 그늘 아래서 10여년간 이름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메릴린치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한국투자공사(KIC)가 2008년 1월 메릴린치 주식 20억달러(약 2조2370억원)어치를 사들였다가 한때 큰 평가손실을 입었다. KIC는 2017년 말 메릴린치를 인수한 BoA 주가가 오르자 보유 지분을 처분해 겨우 투자원금을 건졌다.

메릴린치의 퇴장으로 금융위기 당시 미국 5대 IB 중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만 남게 됐다. 금융산업에서도 상전벽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끊임없는 혁신과 리스크 회피, 경쟁력 강화가 금융산업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상품과 서비스가 겹치는 업종 속성상 조그마한 위기가 언제라도 금융시장을 삼키는 ‘태풍’으로 전이될 수 있어서다. 정부의 과도한 감시와 규제 속에 ‘이자 장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금융회사들이 얼마나 경쟁력을 갖췄는지 의문이다.

정부의 ‘강요된 온실’에서 면허장사에 안주하는 국내 금융회사들의 위기 대처 능력도 우려스럽다. 정부와 금융회사들이 메릴린치의 퇴장을 반면교사 삼아 금융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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