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약속을 지켜라
최근 ‘명당’이란 영화를 봤다. 조선 말 몰락한 왕족 흥선과 세도가인 안동 김씨가 임금을 배출한다는 풍수 명당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살인, 땅의 기운을 알아보는 천재 지관의 등장, 다양한 주변 인간군상이 얽힌 대립이 흥미로웠다.

30년 넘게 변호사 생활을 해온 내가 각별히 관심이 있었던 부분은 흥선이 주위 사람들에게 한 약속의 이행 여부였다. 흥선은 명당을 알려주는 대가로 부귀영화를 약속했지만 막상 천하명당을 찾아준 천재 지관을 한칼에 베어버린다. 반면 권문세족과는 한바탕 정치 싸움을 한 뒤 극적인 타협을 통해 그들의 부귀영화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은 지킨다.

같은 약속인데 돌아온 결과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강자는 힘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지만 약자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강자와의 약속은 지켜지지만, 약자와의 약속은 무시된다. 힘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약속의 본질이 자주 그랬다.

힘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는 약자가 계약의 이행권을 확보하는 방법이 있다. 계약의 문서화다. ‘갑’과 ‘을’의 약속을 구체화해 각자의 권리의무를 자세히 적고, 지키지 않았을 때의 제재조치와 책임을 명문화하는 일이다. 당사자와 계약의 내용 및 작성 시기를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으면 공증이란 절차를 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계약서 작성에 공을 들여야 하는 쪽은 약자인데 현실에선 그렇지 못하다. 약자들은 자주 강자의 약속을 믿고 계약의 문서화 없이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 또는 강자가 제시하는 계약 문안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고 피동적으로 서명해 주기도 한다. 계약서가 아예 없거나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성된 계약서에 서명한 측은 영화 ‘명당’의 지관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영화 속 지관이 명당을 알려주는 대가로 흥선이 약조한 추상적인 부귀영화를 논 몇백 마지기나 금덩어리로 환산해 계약서를 작성했다면 어땠을까. 주변 인물들의 확인을 받고, 더 나아가 명당의 위치를 알려주기 전 풍수 노하우 제공의 금전적 대가를 변호사와 같은 역할을 할 중재인에게 보관(에스크로)해뒀더라면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인정에 의한 관계와 거래가 많다. 그래서 계약, 계약서, 공증, 에스크로 같은 단어들이 개인 간의 약조에 끼어드는 것이 서양처럼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그러나 ‘을’인 사람들에게는 계약의 문서화가 큰 힘이 된다. 굳이 변호사 같은 계약전문가의 조력을 받지 않아도 잘 작성된 계약서를 우선적으로 챙기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을’에 대한 홀대에 우리 사회의 관심이 높은 시점이다. 약속의 이행을 명시한 좋은 계약서를 좀 더 많이 작성해 부당한 약속 파기가 빈번히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