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새로운 출발
늦은 중년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문인답지 않게 흙일과 목공일을 좋아해 손 마디마디가 굵었던 선친은 사계절 자연의 변화에 무심한 변호사 아들에게 “너도 나이 들면 달라질 게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강가의 돌과 언덕의 진달래, 골목 담 너머 장미 하나하나가 마음에 새겨지듯 새로워졌다. 솔밭 바위틈에서 초라한 붉음으로 봄을 장식해 주는 진달래 군집, 여름 능소화들의 만개는 얼마나 농밀한 계절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가. 서초동 골목길의 오죽 화단을 보면서 함께 추운 날들이 지나기를 기다리게 됐다.

만년에 페인트와 톱밥을 얼굴과 작업 셔츠에 묻히고 사셨던 선친에게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요즘은 어디든 가면 자세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강물 색에 봄이 왔구나”라든지 “모처럼의 하늘 푸르름이 어렸을 때 대천 바닷가 같구나” 하는 식이다. 물론 변호사에게는 꽃과 나무보다는 법전과 판례집, 온갖 서류와 무한한 자료 더미가 더 가깝다. 능소화처럼 빙긋 웃는 모습보다는 안경을 쓰고, 미간을 찌푸리고, 엄숙하게 다문 입 모양이 더 자연스러우니 문제이기는 하다.

엊그제 서점에서 경영서를 들추다 보니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미국 금융사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 레이 달리오는 자신의 인생이 ‘제3막’에 있으며, 이제 본인의 성공을 추구하기보다 다른 이의 성공 지원을 남은 삶의 목표로 삼고 싶다고 했다.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는 1600억달러라는 거금을 운용하는 헤지펀드이다. 달리오의 ‘재력과 나이’가 ‘새로운 출발의 시점’을 일깨워 줬다고 할까.

뒤늦게 계절의 조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나이가 됐다. 그렇다면 내 직업엔 어떤 조화와 전환이 필요할까. 지난 2년간 맡았던 대한변호사협회장 임기가 끝나간다. 재임 기간 동안 급증한 변호사, 유사 직역과의 경쟁, 사법행정 남용 사건, 협회와 법조계 내 이견 조정 등을 묶어 난관을 헤쳐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균형을 유지하며 변호사 대표단체를 무난히 이끌었다고 자부한다.

내 삶도 달리오처럼 제3막에 들어서고 있다. 그동안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돌려주는 일이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좋은 변호사가 되는 일, 공정한 사회인이 되는 일, 바른말만 하는 사람이 되는 일. 더 해야 할 일이 많다. 법조계 일원으로 징벌적 손해배상과 집단소송 도입, 민사소송 인지대 감액, 판결문 공개처럼 공익형 제도개선에 진력해야겠다. 고(故) 신영복 선생은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됐다”고 했는데, 나도 ‘옳은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할 생각이다. 그리고 봄이 오면 진달래도 보고, 여름이 오면 능소화도 반갑게 맞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