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예타'가 '정치'가 됐다
공공건설처럼 비용·편익분석에 적합한 사업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업도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연구개발(R&D)도 일정 규모 이상이면 사회간접자본(SOC)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타당성 여부를 가리는, 이른바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한다. R&D에 대한 이런 조사는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SOC와 R&D는 그 성격이 판이하다. SOC 결과는 눈에 보이지만 R&D 결과는 지식으로 나타난다. ‘불확실성’, ‘우연성’ 등이 크게 작용하는 R&D의 경우 SOC와 달리 투자 편익을 제대로 측정하기도 어렵다.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R&D일수록 더욱 그렇다. 미국 정부도 R&D 성과가 지금의 인터넷 확산, 아이폰 개발, 인공지능(AI) 응용 등으로 이어질 줄 사전에 알지 못했을 것이다.

중장기 전략이 있고,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R&D를 하고, 전문가 평가를 존중하는 선진국에서는 예타 같은 걸 도입할 이유가 없다. 거꾸로 말하면 R&D사업 예타를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중장기 전략은 있으나 마나 하고,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R&D를 하기 어렵고, 전문가 평가는 무시당한다는 얘기다.

혁신성장을 말하는 문재인 정부가 이런 문제를 고칠 줄 알았더니 엉뚱하게도 대규모 SOC 예타를 면제하겠다고 한다. 17개 시·도가 예타 면제를 요청한 사업은 33건으로 60조원을 넘는 규모다. R&D엔 예타를 적용하면서 SOC엔 예타를 면제한다는 건 코미디 같은 일이다.

더 황당한 건 광역 지방자치단체별 예타 면제 SOC 사업이 1건 정도는 돼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침’이다. 노무현 정부가 ‘균형’을 이유로 지역사업 예산을 ‘n분의 1’로 나누던 기계적인 공식을 예타 면제 사업 수에 적용하고 있다. 전국 단위로 징수한 세금이니 국가적인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해야 한다는 고민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송재호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은 “가장 필요한 사업이 뭔지 제일 잘 아는 지자체가 제안하는 사업을 들어주는 게 맞는다”고 강변했지만, 지자체가 자기 주머니의 돈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도(또는 중앙정부가 그만 한 돈을 주고 맘대로 쓰라고 할 때도) 똑같은 사업을 추진하려고 할지는 의문이다. 균형위는 이참에 ‘지역 SOC 사업=예타 면제 사업’으로 굳힐 태세다.

“우리는 SOC 유혹을 느껴도 참고 있다”던 문재인 정부가 입장을 바꾼 건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라고(정부는 이것조차 부인하지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과거 정부와는 다르다며 천명했던 SOC 예타 이행 방침을 뒤집어놓고도 사과 한마디 없다는 건, 국민을 무시하는 행위다.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정부가 예타 면제 사업을 선택할 때 야당 지자체장이 있는 지역을 차별하지 말라”는 논평을 내놨다. 여·야 간 예타 면제 담합은 내년 총선을 빼고는 설명이 안 된다.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포크 배럴(pork barrel)’ 정치가 따로 없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공공인프라 투자의 지역 안배와 포크 배럴(2014년)’ 연구에 따르면 우리 정치인은 사적(私的) 유인 때문에 지역주민이 원하는 공급량마저도 초과하는 포크 배럴 지출을 한다. 또 정치인은 자신이 지지를 받는 지역에서 그렇지 않은 곳에 비해 포크 배럴 지출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분석을 바탕으로 KDI는 포크 배럴 억제를 위해 공공인프라 투자 예타에 대한 정치적 영향 차단을 제안했다. 불행히도 현실은 그 반대다.

R&D 실패는 지식이라도 남기지만 대규모 SOC 실패는 ‘과잉 복지’와 더불어 두고두고 미래 세대에 ‘재정 폭탄’을 떠안긴다. 기획재정부는 그때 뭘 한 건지, 그 책임을 물을 날이 머지않아 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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