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한국, 美·中 사이 전략적 균형자 돼야
신냉전시대에 치열한 미·중 경쟁의 틈새에서 한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안보에선 미국을, 경제에선 중국을 우선시해야 하는 한국은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답보 상태에 머물면서 선택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한·미 동맹의 미래와 중국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에 관한 구상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장기적인 비전과 전략을 가져야 한다.

현재 한국이 처한 형국을 보면 몇 년 전 미·중 관계 분야 석학의 말이 떠오른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주요 국제 이슈에서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꺼리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때론 이런 소극적 태도가 부정적 의사 표현보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국제관계에서 예상치 못한 정책적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따끔한 조언도 더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예로 들면서 한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시간을 끄는 과정에서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요즘 워싱턴 정책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질문 중 이 학자의 발언을 곱씹게 하는 것이 있다.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이니셔티브와 미·일이 공동으로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 사이에서 한국의 입장은 뭐냐는 질문이다. 중국의 부상과 함께 미국 주도의 브레턴우즈 시장경제 체제가 한계를 드러내고, 포퓰리즘 및 권위주의 정치체제 확산으로 민주주의 이념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어떻게 하면 미국 주도하에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재정립할 수 있느냐”가 워싱턴의 화두다. 인도·태평양 전략하에 일본은 이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미국이 중국을 확실히 견제하고 국제사회에서 부동의 슈퍼 파워가 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일본의 이런 적극성에 견줘 볼 때, 미·중 사이에서 조용히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한국의 의도가 제대로 이해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처한 입장이 다르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이끌어가야 하는 한국 정부로서는 어느 한 노선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선택은 있다. 하나를 고르지 않고 여러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두 개의 전략은 상충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시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여러 정책은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므로, 이런 비판에 연연하지 않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우선순위에 따라 부분적으로라도 참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신남방 및 신북방정책이라는 비전 아래 독자적으로 안보·경제 협력 정책을 구상하고 있다. 신남·북방정책을 발전시켜 일대일로 및 인도·태평양 전략과 맞물리는 접점을 찾아 구체적인 ‘시그니처 프로젝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효과는 클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들은 안보보다 경제 협력에 무게를 두는 게 더 전략적이라 판단되며, 주요 에너지 인프라 구축에 참여하는 게 그 사례로 적절해 보인다. 에너지 협력이 미·중 경쟁에서 갈등 요소로 작용할 확률이 비교적 낮을 뿐만 아니라,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와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하는 국가들의 주요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수입국과 수입 에너지원을 다변화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

애초 신북방정책은 남·북·러 경제협력을 통해, 신남방정책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와의 협력을 통해 안보 차원에서 북핵 공조를 이끌어내려는 목적으로 구상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비핵화 변수’로 안보 문제와 관련, 강대국 사이에서 전략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게 제한된 상황에선 경제 분야에서 협력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더 효과적이다. 주요 안보 이슈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리스크 요인을 분산시킬 안전지대를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신냉전시대에 한국이 구상하는 한반도 평화를 이뤄내려면 미국과 중국이 이끄는 주요 전략에 다양한 경제협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전략적 균형자의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