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논설위원
[천자 칼럼] 아베의 실리외교

요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경쾌하다. ‘잃어버린 20년’을 이겨내고 경제를 회복세로 돌려 놓은 데다 국제 정치무대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서다. 아베는 지난 주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기간 중 그 어느 국가 지도자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해냈다.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인도 등의 정상과 잇따라 단독 및 3자회담을 하며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무엇보다 미국 중국 사이에서 철저히 실리를 챙기는 모습이 돋보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미·중 무역전쟁 완화를 주문하는 한편 북한 비핵화를 위한 제재 유지도 요청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역사상 두 나라가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말로 만족감을 표시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양국 관계가 과거보다 좋은 여건이며 경제 무역 분야 협력 잠재력이 매우 크다”는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양국은 또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조기 타결에 협력하기로 했다.

일본은 미국과는 대북 제재와 중국 견제라는 커다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중국과는 양국 간 경협 외에도 미국의 통상압력에 대처해야 하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다. 미·중 두 나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최대한 일본의 국익을 챙기는 영리한 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일본 언론들이 아베를 과거 미·중 대립을 중재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비교한 것도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아베의 능수능란한 실리외교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다. 무엇이 국익을 위해 최선인지 끊임 없이 고민한 결과다. 영토와 과거사 문제로 껄끄럽던 중국과의 관계는 지난 10월 아베가 중국을 방문,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급속 해동 단계로 접어들었다. 지난 4월 남북한 정상회담과 6월 미·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재팬 패싱’ 이야기가 나오자 아베는 북·일 정상회담까지 추진하는 등 국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런 외교무대에서의 노력이 통했는지 ‘사학스캔들’과 ‘재팬 패싱’ 논란으로 한때 30%대까지 떨어졌던 아베의 지지율은 최근 다시 50%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 9월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 3연임에 성공한 점도 아베에겐 더욱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다.

아베의 실리외교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는 한국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다섯 번의 정상회담을 했지만 여전히 양국 관계는 냉랭하다. 일본 측의 무성의한 태도와 위안부 화해·치유재단 해산, 일제 강제징용 배상판결 등이 관계개선을 더 꼬이게 만드는 형국이다. 아베의 실리외교가 한·일 관계에서도 빛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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