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청년의 삶을 저당 잡은 나라
한 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할 때가 종종 있다. 2년 전 한 인터넷매체가 찍은 한국GM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조합 사진이 그랬다. 노조 출입문에는 ‘해고는 살인이다’와 ‘신규채용 결사 반대’란 문구가 나란히 붙었다. 한국 노동시장의 불편한 진실이 응축돼 있었다. 이런 의자뺏기식 갈등이 더욱 복잡하고 다원화돼 가고 있다.

점점 분명해진다. ‘일자리 절벽’이 왜 이토록 골이 깊은지. 저성장, 생산인구 감소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른 이유가 또 있어서다. 정치권과 이익집단은 규제입법권과 표를 거래하며 기득권 담합을 공고히 한다. 그럴수록 노동계, 직역단체 등의 독과점 지대(地代)가 커지는 대신, 청년들의 진입장벽은 더 가팔라진다.

공기업·공공기관 고용 세습은 그런 노동시장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규직행 특급열차를 부모든, 노조든 누군가의 ‘빽’이 있어야 올라탈 수 있다면 이는 ‘후(後)조선’ 시대로의 회귀다. ‘블라인드 채용’이 기회의 공평이 아니라 연고주의 은폐 수단으로 악용된 것도 아이러니다. 전수조사든, 국정조사든 파면 팔수록 더 경악할 결과가 나올 것 같다.

또 다른 단면은 노조의 고령화다. 민주노총 조합원 평균연령이 44.5세이고, 현대자동차 노조는 48.2세에 이른다. 지난 10년간 꾸준히 높아졌고, 앞으로도 10년은 더 지속될 것이다. 아버지·삼촌의 고용이 보장될수록 자식세대에는 점점 ‘좁은 문’이 되는 구조다.

위축된 제조업은 고용창출 여력을 잃어간다. 그러면 서비스업 규제라도 풀어야 정상인데, 각론에 들어가면 죄다 꽉 막혀 버린다. 중국 동남아에서도 활성화된 승차공유는 택시업계가 결사반대한다. 원격의료와 투자개방형 병원은 의료계와 좌파 시민단체들에 발목잡혀 있다.

여기에다 정치권은 시민의 일상이 된 복합쇼핑몰까지 의무휴업을 밀어붙일 태세다. 청년이 원하는 일자리가 나올 구석이 안 보인다. 명분이야 국민 안전, 건강, 상생, 서비스품질 등 그럴싸하지만 실상은 공익을 가장한 사익(私益) 추구나 다름없다. 차라리 ‘생존권 보장하라’는 택시업계가 솔직해 보인다.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청년을 주워섬기지만, 선거 때뿐이다. 청년수당으로 입막음할 뿐, 청년 일자리를 위한 구조조정, 노동개혁 등 난제들은 죄다 외면한다. 오히려 정치적 응집력이 약한 청년을 대놓고 홀대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기업 정규직에는 ‘복음’이지만 취업준비생들에겐 점점 ‘헬조선’을 만드는 ‘친노조 정책’을 고집하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청년세대가 지게 될 부담은 눈감은 채 국민연금 소득대체율부터 높일 궁리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혜택은 당장, 부담은 미래’가 모토인 듯하다.

왜 그런지는 인구구조를 보면 이해가 빠르다. 20대(692만 명)와 30대(752만 명)보다 40대(857만 명)와 50대(838만 명)가 251만 명이나 더 많다. 10대(520만 명), 0~9세(440만 명)로 갈수록 급전직하로 줄어든다. 적어도 한 세대 동안 현재 40~50대 중심의 유권자 지형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게다가 진보좌파 진영에서 ‘20대 개새끼론’이 나왔을 만큼 청년들은 특히 586세대와 생각의 결이 다르다. 그렇다고 20대가 보수로 기운 것도 아니다.

창의와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발휘돼야 할 시장경제가 정치적 압력과 규제, 담합에 훼손되면 ‘사회적 태만(social loafing)’을 야기하게 된다. 경쟁 회피적 법·제도를 만들고, 파이 키우기보다는 배분된 몫에 골몰하고, 자신의 삶을 국가에 의존하는 무임승차자만 양산할 것이다. 한마디로 ‘저(低)성과자의 나라’다.

문재인 정부가 진정 청년을 위한다면 청년의 삶을 저당 잡는 법과 제도부터 뜯어고쳐야 마땅하다. 문화연구가 최태섭이 언급했듯 ‘우리 편이라는 괴물’에 끌려가선 답이 없다. ‘우리 편’도 개혁할 수 있어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이제 막 능력을 꽃피우려는 청년들에게 가혹한 나라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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