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역사를 잊지 않아야 내일의 평화도 있다
올해는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이다.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11일 오전 11시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다. 전쟁 희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1600만 명이었다고 한다. 우리에겐 ‘빼빼로 데이’로 친숙하지만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참전국들은 11월11일을 ‘리멤버런스 데이(Remembrance Day·현충일)’로 정해 전쟁으로 안타깝게 산화한 젊은이들을 마음속에 새기고 그들의 넋을 위로한다.

필자가 20년 전 주영대사관 재경관으로 근무한 영국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영국에서는 매년 11월이 되면 왕실부터 일반 국민들까지 붉은 피 색깔의 양귀비꽃을 가슴에 단다. 양귀비꽃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을 상징한다.

양귀비꽃이 이런 상징이 된 계기는 당시 격전지였던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들판에 핀 양귀비꽃을 본 캐나다 군의관 존 매크레이 중령이 지은 시 ‘플랜더스 들판에서’가 유명해지면서부터다. 영국인들은 거기서 죽은 젊은이들의 피를 받아서 양귀비꽃이 피었다고 생각한다. 11월11일에는 여러 전쟁에 참전한 퇴역 군인들이 국회 앞을 행진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비롯한 왕실 귀족들도 군복을 입고 국민들 앞에 선다. 방송은 이를 생중계한다.

영국 사람들이 가슴에 달린 양귀비꽃과 어우러진 모습을 보노라면, 영국인 모두 피로 얼룩진 역사를 잊지 않겠다며 굳게 다짐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마음이 모여 애국심이 되고 안보가 튼튼한 선진국의 초석이 되는 것이리라. 올해는 100주년이니 더욱더 뜻깊고 장엄하게 치러질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한 언론사가 올 현충일에 청소년들에게 “현충일이 뭐냐”고 물었더니 절반 이상의 학생이 제대로 몰랐다고 한다. 일부는 그냥 쉬는 날 아니냐고 했고, 현충일에 태극기를 게양한 집도 소수였다고 한다. 펄럭이지 않는 태극기가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또 목숨 바쳐 희생하신 분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고, 그들의 행적을 어떻게 기리고 있을까. 얼마 전 기사를 보니 6·25전쟁 참전 용사 대부분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참전용사 수당은 30만원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그것도 올해 많이 올라서 이 정도란다. 모두들 80세가 넘은 고령이니 자기 손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분들이다. 작년 말 6·25전쟁에 참전한 80대 유공자가 생활고에 시달려 병든 아내에게 줄 귤 20개를 훔쳤다는 사연이 기억나 죄송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졌다.

최근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전쟁 위협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만들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도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역사를 잊고 안보를 경시하는 풍토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올초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의 일대기를 다룬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란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 영화가 흥행에 참패(?)한 덕분에 한적한 영화관에서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처칠이 총리가 될 당시 분위기는 히틀러와 평화협상을 하자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처칠은 굴복하지 않고 싸웠다. 그가 호전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상대인 히틀러의 과거 행적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의 진의를 냉철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영국의 중심을 잡고 가야 할 길을 굳건히 갔다. 그의 부인 클레멘타인 처칠의 말처럼 불완전하고 확신하지 못했던 처칠이 영웅이 된 이유다.

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공짜도 아니다. 영원히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희생이 있기에 우리가 살아남아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그분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항상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 출발은 역사다. 역사는 과거에 끝난 것이 아니라 내일을 비춰 주는 교훈이다. 처칠은 “과거의 일을 과거의 일로 처리해 버리면, 우리는 미래까지도 포기해 버리는 것이 된다”고 했다. 100년이 지나도 호국영령을 잊지 않는 나라들을 보니, 오늘따라 처칠의 말이 귀에 더욱 크게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