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규제를 규제하라
“세계 랭킹 97위, 105위, 95위. 최근 3년간 대한민국 성적표입니다. 혹시 무슨 순위인지 아십니까?”

필자가 이렇게 물으면 보통 열이면 열,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대한민국은 분명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는데 후진국 수준의 성적이니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퀴즈의 정답은 최근 3년간 한국의 ‘정부 규제 부담’ 순위다.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순위를 구성하는 여러 항목 중 하나다. 대상 국가는 약 140개국.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 세계 6위의 수출 대국인데, 규제는 세계 100위 콩고와 비슷한 수준이라니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규제 성적표만 놓고 보면 한국은 18위 중국보다 한참 뒤처진 규제 후진국인 셈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의 규제 개혁은 지지부진하다. 최근 대통령까지 나서 규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아직 체감을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업인들 사이에선 “규제 개혁은 고사하고 규제가 더 이상 늘어나지만 않아도 다행”이라는 푸념만 들려온다. 국회에 감사위원 분리선출 도입, 지주회사 규제 강화, 유통 규제 강화 등의 규제가 줄줄이 대기 중인 것을 보면 기업인들의 푸념이 괜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반면 해외 선진국들은 경쟁적으로 규제 혁파에 나서고 있다. 2010년 영국은 규제를 하나 도입하면 기존 규제 하나를 폐지해 규제 총량을 유지하는 ‘원 인 원 아웃(one-in, one-out)’ 제도를 도입했다. 우리에겐 이것도 부러운데, 최근엔 규제를 하나 도입하면 기존 규제 세 개를 폐지해야 하는 ‘원 인 스리 아웃(one-in, three-out)’으로까지 강화했다고 한다.

미국도 ‘규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투 포 원 룰(two for one rule)’을 도입했다. 신규 규제 한 개당 기존 규제 두 개를 폐지한다는 행정명령이다. 그 결과 신규 규제는 지난 정부 때보다 20분의 1로 급감했으며, 지난해에만 5억7000만달러에 이르는 규제 비용을 절감했다고 한다. 트럼프 정부의 규제 개혁이 미국 경제의 부흥, 완전 고용 수준의 일자리 호황 비결 중 하나인 셈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2015년엔 베이징시 전역이 의료·교육·금융 등 6개 분야 서비스 규제 완화 구역으로 지정됐다. 핀테크(금융기술) 분야는 우리보다 중국의 사업 환경이 좋다. 노점상에서조차 모바일 결제가 급속도로 늘어나자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현금 결제를 거부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다. 지난해 겨우 인터넷전문은행 영업을 시작한 우리를 한참 앞서고 있다. 우리는 ‘체급’도 작은데 ‘스피드’까지 떨어지는 느낌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규제 선진국’들을 부러워해야만 할까. 이제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때다. 만성질환 수준의 규제 후진국 오명을 벗어나려면 규제 선진국보다 두세 배 뛰겠다는 각오로 규제 혁파에 나서야 한다.

우선 규제 선진국들처럼 규제 총량을 제한해야 한다. 어렵게 규제를 몇 개 풀어봐야 다른 쪽에서 규제를 수십 개씩 도입한다면 제대로 된 규제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 영국처럼 ‘원 인 스리 아웃’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원 인 원 아웃’이라도 도입해 제대로 운영해 보자. 또 한국에만 있는 규제는 과감히 없애야 한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 특성상 세계와 동떨어진 규칙이 많을수록 우리 기업에만 불리할 뿐이다. 이번만큼은 선진국 규제와 비교·분석해 최소한 우리 기업에만 채워져 있는 ‘모래주머니’는 제거해야 한다.

한국에선 규제 탓에 신산업은 엄두도 못 낸다는 것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세계 100대 혁신 사업 중 한국에서는 57개 사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구글이나 우버 같은 혁신 기업이 한국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아마도 10년 전 우버가 한국에 세워졌다면 지금처럼 65개국에 진출해 승승장구하기는커녕 온갖 규제 때문에 불법 기업으로 낙인 찍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에는 왜 구글 같은 기업이 없냐고, 왜 구글같이 못하냐고 비난하기보다 구글 같은 회사가 나올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 보자. 방법은 있다. 민간과 힘을 합쳐 규제를 과감하게 규제하는 것이다. 시작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