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실언(失言)과 식언(食言)
지난해 타계한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키 194㎝, 몸무게 170㎏의 거구였다. 그 체구에 말투가 어눌해서 온갖 풍자의 대상이 됐다. ‘콜 조크’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우스갯소리로 퍼져 있다.

한번은 그가 정원을 청소하다가 수류탄 세 개를 주웠다. 아내와 함께 경찰서로 갖고 가는 길에 아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도중에 수류탄 한 개가 터지면 어떻게 하죠?”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두 개를 주웠다고 말하면 되잖아.”

이런 이미지와 달리 그는 최연소 기록을 무수히 갈아치운 ‘정치 거인’이었다. 통일 독일 초대 총리로 퇴임하기까지 국가 번영과 유럽 통합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그의 말투는 어리숙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는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완성한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이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키 191㎝에 몸무게 108㎏의 거구다. 그는 유머보다 실언(失言)으로 연일 구설에 오르고 있다. 최근 미·러 정상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의 (미국)대통령 선거 개입 의혹을 제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며 정보기관 발표와 정반대 말을 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다음날 “‘러시아가 하지 않을(it wouldn’t)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했다는(it would) 이유를 모르겠다’고 잘못 말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어제도 “러시아가 여전히 미국을 겨냥하고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아니다(Thank you very much, No)”라는 답을 반복하다가 망신을 당했다. 백악관 대변인이 나서 “대통령이 ‘No’라고 말한 건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잇단 실언 파문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는 러시아와 함께 미·러 사이버 보안대를 창설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가 후폭풍이 일자 “그런 일 없다”고 잡아뗐다. 정치에서 ‘의중을 떠보는 말’이야 있을 수 있지만 한 번 꺼낸 말을 뒤집는 식언(食言)은 곧 거짓말이다. 트럼프의 식언은 한두 번이 아니다.

북한 비핵화를 하루아침에 해낼 것처럼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한껏 외치다가 지난달 김정은을 만난 뒤 “시간과 속도에 제한 없이 긴 호흡을 갖고 가겠다”고 말을 바꿨다. “북한의 ‘살라미 전술’에 말려들어 ‘지루한 참호전’을 벌일 것”이라는 비판에도 귀를 닫고 있다.

트럼프가 “덩치값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과 달리 레이건 전 대통령이나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말에 ‘유머의 옷’을 입혀서 전달했다. 그래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정치인의 말은 무게가 달라야 한다. 혀는 칼이기도 하다. 우리 정치권은 어떤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