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다이아몬드 국가' 싱가포르
1960년대 초 동남아에는 절친했던 두 독립영웅이 있었다. 말레이시아 초대 총리 툰쿠 압둘 라만(1903~1990)과 싱가포르 국부(國父) 리콴유(1923~2015)다.

이들의 주도로 1957년 말레이반도 11개 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1963년에는 싱가포르와 보르네오섬의 사바, 사라와크가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됐다.

그러나 말레이계 우대정책을 편 툰쿠에게 통합을 내건 리콴유는 크나큰 정치적 위협이었다. 이미 중국계 화교가 경제권을 쥐고 있는데 싱가포르까지 더해져 화교에 장악될까 우려한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60%, 중국계 25%지만 싱가포르는 거꾸로 중국계 74%, 말레이계 13%, 인도계 9%로 구성돼 있다.

툰쿠는 1964년 말레이계와 중국계 간 두 차례 유혈사태를 빌미로 이듬해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했다. 리콴유는 눈물을 흘리며 독립을 선포했다. 쟁취한 게 아니라 독립을 ‘당한’ 셈이다. 하지만 최선의 복수는 상대보다 더 잘사는 것이다. 토지도, 자원도 없는 싱가포르는 1인당 소득 6만달러의 아시아 최고 부국이 됐다. 반면 고무, 주석 주산지인 말레이시아는 1만1000달러에 머물러 있다.

19세기 초만 해도 싱가포르는 작은 어촌이자, 해적들의 은거지에 불과했다. 1819년부터 영국이 동방무역 거점으로 키웠지만, 일본 점령기(1942~1945)에는 약 10만 명이 학살당한 상흔도 있다. 민족 간 갈등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위협도 상존했다. 면적은 간척을 통해 넓어진 게 고작 서울의 1.2배(720㎢)다.

그런 싱가포르의 성공 비결은 결핍과 절박함이었다. 독립 당시 변변한 산업도, 농업기반도 없어 생존 자체가 불투명했다. 지금도 전기·수도는 말레이반도에 의존한다. 하지만 리콴유는 동서 무역 요충이란 지리적 이점을 살려 물류허브 전략을 펴고, 파격적인 인센티브로 외국기업을 유치했다. 강력한 규율과 영어공용화 등 통합정책도 폈다. 중국 덩샤오핑은 싱가포르 같은 도시 1000개를 구상했다고 한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국가경쟁력 3위 안에 드는 일류국가로 거듭났다. 마름모꼴 국토 모양에 빗대 ‘다이아몬드 국가’라고 자부할 만하다. 지난해 5월에는 다이아몬드거래소를 개설해 세계 다이아몬드 허브자리까지 노리고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도 고민이 많다. 셰일혁명으로 석유 물동량이 줄어 물류허브로서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조선 철강 등 공업화에 주력하고, 껌조차 불허하던 나라가 카지노를 허용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오늘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미·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싱가포르는 행사 비용으로 160억원을 쓴다고 한다. 세계 이목이 집중된 이벤트로 국가를 홍보해 몇십배 더 뽑을 수 있다는 기막힌 상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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