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경리 동상
200여 년간 제정 러시아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문화예술의 도시다. 러시아 문학 거장인 푸시킨과 도스토예프스키, 음악가 차이코프스키, 무소륵스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와 인연도 깊다. 대한제국의 첫 해외 상주 공관이 이곳에 설치됐다. 그 공관 건물에 한때 푸시킨이 살았다.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시구처럼 파란만장한 생을 보냈다. 그의 외증조부는 에티오피아 출신 노예로 팔려왔다가 표트르 대제의 측근 장군이 된 아브람 간니발이다. 푸시킨의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는 그 영향이다. 이곳 중심가 네프스키 대로의 미하일로프 광장에 푸시킨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푸시킨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이 있다. 푸틴 대통령의 모교이기도 한 이곳에 요즘 한국문학 붐이 한창이다. 박경리 작품만 강의하는 특별 강좌가 생겼다. 《토지》 러시아어 번역본과 《박경리, 넓고 깊은 바다처럼》이라는 총서도 출간됐다. 지난해에는 한국학과까지 개설됐다.

이 대학의 니콜라이 크로파체프 총장은 대표적인 지한파다.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대화 채널인 ‘한러대화’의 러시아 측 조정위원장인 그는 지난해 5월 방한해 “한국 문학 거장인 박경리 작가 동상을 대학 안에 세우겠다”고 말했다. 2013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앞에 푸시킨 동상이 건립된 데 대한 화답이라고 했다. 당시 제막식에는 푸틴 대통령도 참석했다.

박경리의 《토지》는 1897년 음력 8월15일부터 1945년 양력 8월15일까지 민초들의 애환을 담은 대하소설이다. 책으로 21권, 원고지로 3만1200장에 이른다. 작가가 40대 초반부터 60대 후반까지 인생의 3분의 1을 바쳐 집필한 대작이다. 푸시킨이 박경리보다 1세기를 먼저 살다 갔지만, 민족적 정서와 역사를 폭넓게 아우른다는 점에서는 두 작가의 열정이 닮았다.

박경리 동상은 지난해 9월 대한항공의 무상운송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 도착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때 제막식을 하려 했으나, 문 대통령이 멀리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 정상회담을 하는 바람에 미뤄져왔다. 박경리 타계 10주기인 올해 공식 제막식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박경리 기일인 5월5일을 전후해 《토지》 무대인 하동과 작가 고향인 통영에서 10주기 추모제가 개최된다. 12일에는 토지문화관이 있는 원주에서 동상 제막식이 열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동상이 제막되면 박경리 문학의 접점이 국내에서 해외까지로 넓어진다. 그 장소가 푸시킨이 ‘유럽을 향한 창’이라고 불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여서 더욱 의미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