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협상의 기술
6·25 정전협상에서 유엔군 측 초대 수석대표를 맡은 터너 조이 제독은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반면 북한의 남일(南日) 대표를 비롯해 중공군의 덩화(鄧華) 등은 고도의 정치훈련을 받은 공산주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은 회담 장소나 테이블 배치에서부터 술수를 부렸다.

유엔 측은 덴마크 병원선을 원산항에 정박시켜 협상장으로 쓰자고 했지만, 북은 “개성으로 와야 대화하겠다”고 버텼다. 회담장에 앉아보니 유엔 측 의자만 낮게 배치돼 있었다. 북한 남일의 의자는 10㎝나 높았다. 이후로도 공산 측은 협상을 지연시키거나 돌출사건을 만들어 내며 끊임없이 유엔 측을 괴롭혔다.

조이 제독은 훗날 정전협상 과정을 기록한 회고록에서 “협상시기부터 좋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공산군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패퇴하던 때, 유엔군이 휴전 의사를 타진한 게 실책이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엔 측이 지상군 공세를 멈추자 공산 측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상호 약속뿐만 아니라 합의문 내용까지 부인하기 일쑤다. 문서 자체를 부정할 수 없을 때는 “당신의 해석이 잘못됐다”며 억지를 부리고, 이마저 불리해지면 ‘무효화 전술’을 쓴다. 핵 문제에서도 협상과 파기, 재협상 과정을 반복해왔다. 1991년 비핵화 공동선언 이후 이런 악순환을 거듭하며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계속했다.

이번 남북한 정상회담에서는 어떨까. 국내외 전문가들은 “협상에서 범하는 가장 잘못된 행동은 절박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번에야말로 되돌릴 수 없이 확정적인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주문도 덧붙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만남에 기대를 나타내면서도 “협상 결과가 좋지 않으면 걸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거래의 기술》의 저자인 그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힘의 우위에서 협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이 대화를 먼저 제안한 것도 최대의 압박 때문이라는 얘기다.

북한 김정은은 지난해 ‘절친’인 미국 농구스타 데니스 로드먼으로부터 《거래의 기술》을 선물로 받았다. 그런 만큼 트럼프식 협상 노하우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만큼 노련한 협상력을 우리 측이 가졌느냐다. 의견이 충돌할 때 하나씩 양보해서 푸는 합리적 사고는 ‘예측 불가능한 상대’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곤 했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중거리핵전력협정’을 중재했던 짐 토머스는 《협상의 기술》에서 “반대급부로 얻는 것이 없다면 절대로 양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자칫하면 ‘협상의 기술’이 아니라 ‘내주기의 기술’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얘기다. “공산 측이 알아듣는 논리는 오직 힘뿐”이라는 조이 제독의 조언도 새길 만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