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 남북 예술단 교류, 정례화하자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24일, 프랑스 북부 독일군 점령지역. 100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접전을 벌인 영국·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전투를 멈췄다. 노래가 계기였다. 영국 군인들이 백파이프 반주에 맞춰 ‘영원한 고향을 꿈꾸네’라는 노래를 부르자 독일군 진영에선 성탄절 노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하나둘 참호 밖으로 나온 양측 군인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나누며 성탄 전야를 즐겼다. ‘크리스마스 휴전’으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영화(메리 크리스마스)로도 제작돼 2007년 개봉됐다. 음악의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사례다.

K팝, 북녘에도 통할까

오는 31일부터 평양에서 남한 예술단 공연이 펼쳐진다. 남한 예술인의 북한 공연은 2005년 조용필의 평양 공연 이후 13년 만이다. 160여 명으로 구성된 남한 예술단에는 조용필을 비롯해 이선희 최진희 윤도현 백지영 정인 서현 알리, 걸그룹 레드벨벳 등이 포함돼 있다. 조용필 이선희 최진희 윤도현은 이미 평양 공연 경험이 있고, 다른 가수들은 처음이다. 공연의 레퍼토리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가수들 면면을 보면 트로트부터 K팝까지 다양한 노래를 들려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 동포들은 남측 공연 때마다 열광했다. 조용필 공연 땐 고가의 암표가 나돌 정도였다. 이선희의 대표곡 ‘J에게’는 북한에서도 인기곡이다. 지난달 평창 동계올림픽에 맞춰 방문한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은 이 노래를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선보였다. 최진희의 대표곡 ‘사랑의 미로’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애창곡으로 유명하다. 2002년 남한 록밴드로는 최초로 평양에서 공연한 윤도현은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공연으로 북녘 관객을 열광시켰다.

이번 공연에서 특히 기대되는 건 처음 방북하는 백지영 정인 알리 등 젊은 가수들의 무대다. 교류가 없었던 지난 10여 년간 달라진 남한의 대중음악을 한층 진화하고 젊은 감성으로 전할 것이란 점에서다. 특히 아이돌그룹 레드벨벳은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는 K팝을 북한에 처음 선보이게 돼 관객 반응이 주목된다. 북한의 젊은 층 상당수는 이미 K팝에 익숙하다. 지난해 11월 총상을 입은 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넘어온 북한 귀순병사가 의식을 되찾은 후 꺼낸 말이 “남한 노래를 듣고 싶다”였다. K팝 가수를 더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일각에서 나오는 이유다.

교류 정례화로 접촉 늘려야

1985년 이산가족 상봉단과 함께 예술공연단을 교환하며 시작한 남북 문화예술 교류는 2000년 6·15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가 바뀌고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2007년 5월부터 약 10년 동안 남북의 전문가들이 구슬땀을 흘렸던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은 3만5000여 점의 유물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2016년 1월 북한의 핵실험과 이에 따른 남측의 개성공단 폐쇄로 중단된 상태다. 불교 조계종과 천태종이 각각 몇 년씩 걸려 복원한 금강산 신계사와 개성 영통사도 왕래가 끊긴 지 오래다. 지난해 10월에는 조선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를 북한이 단독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도 했다.

남북의 공연예술 교류를 봄·가을, 신년·연말, 광복절 등으로 정례화하면 어떨까. 올림픽이나 정상회담 같은 큰 행사의 분위기 조성용 교류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물론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모든 교류가 얼어붙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례화라는 장치를 만들어 놓으면 교류의 기회를 늘릴 수 있고, 경색 국면에서도 속도를 조절할 명분이 생기지 않을까.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