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권력과 자제(自制)
재판을 하다 보면 상대방을 나쁜 사람이라며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문맥에 따라 들어보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경우가 많다. 즉 ‘동네 사람이 굶고 있는데 자기 곳간에는 쌀이 썩고 있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썩고 있는 쌀이 누구도 시비할 수 없는 자기 쌀이라고 해서 나쁜 사람이라는 비난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소박한 사고방식은 개인 책임주의가 지배하는 근대사회의 기본 이념과는 잘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서 의식의 바닥에 놓여 사람들의 심정적 공감을 받고 있으며 역사와 사회를 넘어 존속하고 있다.

법치주의하에서 법적 책임을 함부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 의무를 법적 의무로 전환하는 것은 당초의 좋은 의도와 달리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그러나 자발적인 자제와 배려를 통해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권장돼야 마땅하다.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이런 자발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기득권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기득권은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의 기본이 된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점유)은 가장 기초적인 기득권 중 하나다. 인간 사회에서 기득권은 일단 보호되며, 심지어 유인원 사회에서조차 점유는 일정한 방식으로 존중된다는 연구가 있다.

지하철에서 빈자리를 발견하고 먼저 앉았다면 정당하게 기득권을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권리라 하더라도 자기 앞에 노약자가 서 있는데 모르는 척 계속 앉아서 기득권을 즐기고 있으면 도덕적 비난을 받는다. 자신에게는 약간의 이익이 될 뿐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큰 손해나 부담이 되는 권리를 제한 없이 행사해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 기득권을 갖지 못한 자의 상대적 박탈감은 쉽게 정의가 침해됐다는 감정으로 이어진다.

권력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의사를 강요하고 관철할 수 있는 지위나 입장을 의미한다. 이런 권력은 사회적인 직책이나 지위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에게 권력을 행사하며, 이런 권력 관계는 복잡한 매트릭스를 이루며 얽혀 있다.

권력의 행사는 남에게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므로 자제와 배려가 반드시 필요하다. 권력을 남용할 때 상대방에게 잊히지 않는 분노와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을 남기게 된다. 소위 ‘갑질’에 대한 분노는 수많은 사람의 경험을 통해 집합의식을 형성했다.

권력이 정당한 것이라고 해서 남용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이 윤리적 우월성까지 겸비하고 있다고 믿는 경우 자제와 배려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줄어들어 권력 남용의 위험성이 커진다. 이에 대한 정치권력의 대응 중 하나는 자동성(自同性)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즉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본질적으로 같으면 다수결의 한계니 소수자 보호니 하는 문제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독일 나치가 이런 입장을 취했으며 그런 동질성 확보에 장해가 되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 유대인 등 비동질적 부분에 대한 박멸 시도로 나타났다.

권력은 남용되기 쉬우며 인류는 이를 막기 위해 권력의 분립과 상호 견제 등 여러 장치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제도적 장치에는 한계가 있다. 제도가 끝나는 곳에서 기득권이나 권력을 가진 자의 자제와 배려만이 공동체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 자제와 배려는 제도화를 통해 근본적으로 담보하기 어렵다. 자제를 제도화한다면 이는 도덕의 법제화로서 이미 자제가 아니며 그로부터 이익을 보는 자에게 새로운 권력을 부여하는 결과가 될 뿐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 대해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일상적으로 이를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제와 배려는 늘 염두에 둬야 하는 문제다. 이런 도덕적 공감대가 사회 전체에 공고하게 형성된다면 정치 사회적인 권력의 행사에서도 자제와 배려가 더 세련되게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