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나혜석과 마리 로랑생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여성 화가 이름은 그 이름도 유명한 프랑스 국적의 마리 로랑생이다. 1900년대 초 새로운 미술운동으로 태동한 입체파와 야수파 사이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그의 그림은 남성 중심의 유럽 화단에서 여성적인 예쁜 그림으로 폄하됐던 시절을 지나 이제 와서는 오히려 현대인의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그림으로 느껴진다.

1970년대 후반인 우리 대학 시절만 해도 굵은 붓 터치와 대담한 남성적인 구도, 뭐 이런 게 평문을 장식하는 칭찬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훌륭한 예술가란 다름 아닌 그 아무도 닮지 않은 자기 자신의 흔적을 지구라는 돌 위에 새겨놓은 사람일 것이다. 로랑생이 20대에 그린 자화상은 슬프고 고독하게 보이지만,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굳은 의지와 자유로운 정신이 엿보인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그 유명한 시 ‘미라보다리’는 그를 향한 마지막 편지였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이 구절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1911년 루브르박물관에서 다빈치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된 아폴리네르와 그를 감싸 안지 못한 로랑생은 이별을 맞는다.

이후 독일인 남작과 결혼한 그는 1주일도 안 돼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국적이란 이유로 프랑스와 독일 어디로도 못 가고 스페인으로 망명한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이 돼서야 입국이 허락된 그는 이혼하고 프랑스로 돌아온다. 아폴리네르는 참전의 상처와 독감으로 사망한 뒤였다. 이후 로랑생은 삶의 질곡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굳건하게 걸으며, 섬세한 감성과 황홀한 꿈 같은 색채의 많은 그림을 남겼다. 말년의 로랑생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림만이 영원토록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다.”

프랑스 귀족의 혼외자로 외롭게 자란 그가 두 번의 세계 전쟁을 겪고 아무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해도 13년 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최초의 도쿄 미술 전문학교 유학생이며, 여성으로선 처음 전람회를 연 최초의 여성 화가로, 개화기 시절 신여성의 상징이던 나혜석의 쓸쓸한 생애에 비하면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다리처럼 그저 아름다운 꿈이다. 외교관의 아내로, 화가로, 문필가로, 어머니로 활기찬 삶을 살았던 나혜석은 파리 체류시절 한때의 연애 사건으로 가족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존재가 돼 이후 그림으로도 삶으로도 재생할 수 없었고, 1946년 52세에 행려병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나혜석의 고향인 수원 팔달구 인계동 인근에 가면 젊은이들의 거리인 ‘나혜석 거리’가 있다. 화재로 그림들이 소실돼 몇 점 남아 있지 않아 참 안타까운 그의 그림 중 우울한 ‘자화상’이 있다.

젊은 날의 고독한 로랑생의 자화상과 세상의 풍파를 다 짊어진 듯 우울한 나혜석의 자화상을 비교해본다. 남성 중심 세상에 과감한 도전장을 던진 나혜석은 화가며, 뛰어난 문필가며, 두 세기는 뛰어넘었을 대한민국 여성해방의 선구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요즘은 나혜석의 예언이 딱 맞아 들어가는 신기한 기분도 든다. “조선의 남성들아,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니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리라. 그러니 소녀들이여 깨어나 내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