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의 논점과 관점] 주목되는 '중도주의 실험'
국민의당 내분 사태는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파국적 균형론’을 떠올리게 한다. 이질적인 세력들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손을 잡았지만 갈등이 부풀어 올라 언제 파국을 맞을지 모르는 상황을 뜻한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내부 다툼이 지속되지만 함부로 이별하지도 못한다.

국민의당 상황이 딱 그렇다. 지난 8월 초 안철수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외친 뒤 호남 중진의원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호남계)가 반발하면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안 대표가 통합 찬반을 묻는 전(全)당원투표를 선포한 데 대해 호남계는 투표 금지를 요청하는 가처분 신청서를 법원에 내는 등 극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합의이혼’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간단하지 않다. 국민의당은 안 대표와 호남계가 총선과 대선을 겨냥해 지난해 급조한 당이다. 안 대표로선 호남이라는 지역적 배경을 지닌 정치세력이, 호남계는 안철수라는 ‘간판’이 필요했다. 안 대표는 호남을 등지고는 바른정당과의 통합에서 주도권을 쥐기 힘들다는 딜레마가 있다. 호남계는 안철수계가 탈당하면 원내교섭단체 지위마저 잃을까 걱정된다.

'파국적 균형론' 떠올리게 해

그람시 이론을 적용해 보면 국민의당에는 세 갈래 길이 있다. 친(親)안철수 세력과 호남계가 완전한 파국으로 가거나, 새 합의를 통해 ‘재균형’을 잡는 길, 갈등만 장기화하는 것 등이다. 27일부터 실시되는 투표에서 안 대표가 내세운 ‘중도주의’가 얼마나 호소력을 지닐지가 관건이다. 그는 통합의 명분으로 ‘중도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중도주의가 통하느냐 여부는 안 대표의 정치 생명과 직결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중도는 뿌리를 내리기 힘들었다. 각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유권자 이념 분포는 대체적으로 보수와 중도, 진보가 비슷한 규모로 나뉜다. 그럼에도 중도 후보가 정권을 잡기 어렵다는 것은 불문율이 되다시피 했다. 선거판을 좌지우지한 것은 영호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였다.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안 대표는 중도주의를 통해 이런 틀을 깨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념적 온건성과 합리적 중간지대를 표방하고, 지역에 기반을 둔 기존 정당체제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중도신당’으로 개념을 정립해 내년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다당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전략으로도 읽힌다.

국가 비전·가치 뚜렷이 밝혀야

난관이 적지 않다. 호남계를 끌어안은 채 바른정당과 통합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색깔이 다른 두 세력을 융화하고 중도주의를 자리잡게 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호남계를 배제하고 바른정당과 손잡을 때는 현 국민의당 의석 수에 훨씬 못 미치는 ‘소수당’에 그친다. 이런 정치세력으론 중도주의가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중도주의는 일관되고 분명한 지향점을 찾기도 쉽지 않다. 이미 국민의당은 ‘5·9 대선 패배 보고서’에서 “안철수 후보가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고 내용도 없는 중도를 표방함으로써 대안이 없다는 이미지를 심어줬다”고 분석한 바 있다. ‘맥락없는 중도’라는 비판도 들었다.

이 때문에 중도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무엇을 위한 중도통합인지를 뚜렷하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도통합으로 탄생하는 당이 ‘모호한 중간지대’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어떤 국가적 비전과 가치를 추구하는지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국민 마음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파국적 균형’의 끝이 단순히 내년 지방선거용 정치공학적 세력 간 결합에 그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