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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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는 성공을 바라는 기업과 고수익을 원하는 투자자들이 몰리는 ‘21세기 욕망의 땅’이다. 예전에는 몇몇 벤처투자자만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자금을 댔지만 이제는 세계 국부펀드 및 대기업도 주목하고 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투자 규모가 커지면서 2018년의 스타트업 투자 수익률이 나빠지거나 큰 실패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기술과 돈이 넘치는 실리콘밸리에서 ‘투자의 보증수표’로 불리는 이름이 있다. 러시아 출신의 정보기술(IT) 벤처투자자 유리 밀너 DST(Digital Sky Technologies)글로벌 창업자(56)다. 그는 2009년 페이스북에 2억달러를 투자해 20배 넘는 수익을 올리며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 업계에서 주목받았다. 옛 소련 시절 이론물리학을 공부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땄다는 이색적인 경력을 지닌 밀너는 자신의 전공을 활용해 유망 IT 기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우주 개발을 비롯한 과학에 거금을 투자하는 유력 후원자이기도 하다.

소련에서 물리학 전공하고 미국으로 이민

[Global CEO & Issue focus] 유리 밀너 DST글로벌 창업자
196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밀너는 러시아 명문 모스크바국립대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엄청난 천재가 아니면 물리학 분야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학자의 길을 포기했다. 그는 1990년 미국으로 이주해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MBA를 취득한 그는 세계은행에서 근무했으며 1990년대 중반 러시아 석유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의 투자회사 얼라이언스 메나텝에서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했다. 그는 당시 업계에서 “러시아 투자시장에 국제 시장의 중요한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는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9년 밀너는 모건스탠리가 작성한 온라인 비즈니스 보고서를 읽고 이 분야에서 사업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이듬해 IT 창업투자회사 넷브리지를 창업해 인터넷 쇼핑몰 같은 사업을 시작했다. 넷브리지는 당시 온라인 비즈니스를 이끌던 미국식 사업 모델을 러시아에 이식해 각종 사업을 운영했다. 이후 2001년 러시아 IT 기업인 메일닷루의 CEO가 됐고 2005년 투자펀드인 DST를 설립해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일궈낸 메일닷루는 2010년 런던증권거래소에서 시장가치 56억달러(약 6조원)를 기록하며 기업공개(IPO)에 성공했다. 이후 몇 차례의 구조조정을 거치며 IT 투자사 DST글로벌을 운영했다.

온라인 기반 전자상거래에 집중 투자

밀너가 유명 IT 투자자로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는 페이스북 투자다. 그는 2009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페이스북에 2억달러 투자를 결정했다. 그는 소셜미디어가 가진 빅데이터의 힘에 주목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도 밀너의 제안을 받아들여 투자가 성사됐다. 이후 페이스북이 IPO를 거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그는 40억달러의 대박을 터뜨렸다. 이후 알리바바, 징둥(JD닷컴) 등 중국 IT 기업에도 눈을 돌려 중국 차량호출 앱인 디디다처와 콰이디다처의 합병에도 관여했다.

세계 IT 기업에 70억달러를 쏟아부은 밀너의 투자 원칙은 명확하다. 온라인기업과 오프라인기업이 전자상거래 시장을 놓고 결투를 벌이고 있지만 최종 승자는 온라인으로 시작한 회사가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밀너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소비자들은 지출의 6%를 전자상거래에 할당하고 있지만 향후 20년 안에 20%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월마트가 온라인 사업을 강화하고, 아마존이 홀푸드를 인수하는 등 온-오프라인 융합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면서도 “처음부터 온라인으로 시작한 기업들이 전자상거래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가 IT 기업에 주력하는 것도 이 같은 원칙 때문이다.

서류에 적힌 각종 수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있지만 밀너는 여전히 현장을 우선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밀너가 2011년 징둥에 투자할 때도 그는 창업자인 류창둥을 직접 만나기 위해 중국 우루무치까지 달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투자를 할 때 회사가 현 상황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있는지와 성실히 일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겨서다.

과학 분야에 아낌없이 자금지원

밀너는 2012년 실리콘밸리 거물들과 의기투합해 브레이크스루라는 상을 만들었다. 기초과학 발전에 공헌한 과학자, 기술인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실리콘밸리의 노벨상’이라고 불린다. 그도 이론물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유리 밀너라는 이름도 인류 최초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에서 따왔을 정도다.

지난해 그는 1억달러를 투자해 인류 최초의 항성 간 여행 계획인 ‘브레이크스루 스타샷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가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계인 ‘알파 센타우리’에 스마트폰 크기의 초소형 우주선 1000여 개를 보낸다는 계획이다.

IT 투자자와 과학기술 후원자로 자리매김한 밀너는 최근 러시아 정부와의 연루설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지난달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조세회피 보고서 ‘파라다이스 페이퍼’를 통해 2011년 VTB뱅크, 가즈프롬 같은 기업들로부터 나온 자금이 역외 기업과 DST가 만든 펀드를 거쳐 트위터, 페이스북에 투자됐다고 밝혔다.

밀너는 언론에 “트위터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투자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도 해당 의혹을 부인하고 있지만 IT판 러시아 스캔들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은 밀너가 해소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