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윤의 '역지사지 중국' (7)] 중국말은 귀로만 들으면 안된다
중국 사람들은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듣고 나서 판단하자”고 얘기할 때 대부분 “看他說(간타즘마설: 우선 그가 뭐라 말하는지 보자)”라고 말한다. ‘듣고 나서’가 아니라 ‘보고 나서’ 판단하라는 얘기다. 친한 중국인 친구가 농담삼아 말한다. “우리 중국인과의 대화는 말대로 들으면 안 돼. 뇌를 봐야 하는데, 그것도 앞뇌가 아니라 뒷뇌를 봐야 해!” 앞뇌와 뒷뇌의 작용에 대한 뇌과학 얘기가 아니다. “말을 문자 그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 앞뇌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의미하는데 이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하다. 뒷뇌, 즉 드러나지 않는 진심이 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필자가 몸담았던 국내 한 그룹의 관계사는 중국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내부 여건상 당초의 투자 일정을 반 년 이상 연기해야 했다. 문제는 당시 규정상 반 년 이상 투자 집행이 연기되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설비 면세 등의 지원금액은 당시 수백억원을 넘었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

본사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지원 규정 기한이 올해까지인 것은 잘 안다. 그런데 회사 사정이 이러하니 특별히 봐줄 수 있는지 알아봐라. 내일 아침에 그룹 회의에서 결정할 예정이니 오늘 중으로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규정은 명백히 위배되는데 그래도 손실이 너무 크니까 방법을 찾아보라’는 지시였다.

[류재윤의 '역지사지 중국' (7)] 중국말은 귀로만 들으면 안된다
당시 규정은 현장 상황과 다소 거리가 있어서 조정돼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룹본사는 정부 업무를 하는 중국인 등을 통해 다방면으로 확인했는데 아무런 결과가 없었다며 “반드시 오늘 중으로 보고하라”고 다그쳤다. 어쩔 수 없이 담당부서 국장을 찾아갔다. 그는 서너 명의 부하직원을 데리고 나왔다. 필자는 간단한 인사 후 直裁了當(직재료당·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가 스트레스가 많겠다”는 위로와 함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라. 그럼 이제 돌아가라.” 그리고 나서는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되지?”라고 배석한 직원들에게 묻고는 출장가야 한다며 바로 자리를 떴다.

회사로 복귀하는 내내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보고해야 하나. 실제 나눈 대화가 몇 마디 없다 보니 보고서를 쓰기가 막막했다. 추론해보면 규정 변경은 이미 진행 중인 것이 분명했다. ‘수정될 규정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며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투자를 연기해도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수백억원의 현금이 걸린 문제를 이런 식의 추측성 보고서로, 그것도 단 두 문장으로 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쓴들 그룹 본사에서 믿어줄 리도 만무했다.

결국 면담 중 나눈 두 줄의 대화 내용 외에 장황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 담당국장의 성격은 물론이고 중국인의 화법에 대해 나름의 소개를 했다. 결정적으로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되지?”라며 부하 직원들에게 묻는 광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아직 발표가 되지 않은 규정에 대한 얘기를 외부에 공개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부하직원들에게 공개적으로 묻는 것은 ‘이제 개정된 규정의 발표가 거의 임박했다’ 내지는 ‘규정 수정은 이미 큰 틀에서 확정됐다’는 결정적인 암시였다.

그룹투자는 약 1년 뒤에 이뤄졌고 회사는 불필요한 선행 투자의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중국으로서도 수억달러의 투자를 원만히 유치하게 되는 ‘윈윈’을 이룰 수 있었다.

모호한 화법이 예의와 수준 보여줘

중요한 인사와 채용을 위한 면접을 했다. 그의 고향이 쓰촨(四川)이라서 베이징 시내의 쓰촨식당에서 만났다. 동석한 본사 임원이 “이 음식점이 쓰촨 정통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하지 않고 종업원을 부르더니 “이 양념은 어디에서 가져오나요?”라고 물었다. 종업원이 “근처 시장에서 구입합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마치 “이제 아셨죠?”라고 대답하듯 미소를 지었다.

면접이 끝난 뒤 배석한 중국인 직원이 “그 사람 수준이 대단히 높네요!”라고 평가했다. 그가 구입처를 물어본 양념은 쓰촨의 전통양념이다. 현지 양념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로 제대로 된 쓰촨음식점이 아니라고 에둘러 말한 것이다. 대답은 분명했지만 음식점이 정통이 아니라고 노골적으로 나쁘게 말하지도 않았다.

知者不言, 言者不知(지자불언, 언자부지: 아는 이는 말을 안 하고, 말한 이는 모른다). 속내를 읽어내는 것, 이것이 중국인과의 대화의 시작이다.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중국인도 어려워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자.

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