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국의 보수는 설 땅이 없는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세력이고, 진보는 ‘더불어 잘살자’는 세력”이라고 말했다. ‘보수=반(反)개혁’ ‘진보=평등’이라는 프레임은 단순하고 명쾌해 대중을 사로잡았다. 보수 정치인들은 반개혁으로 낙인찍히기 싫어 진보의 논리를 개혁보수로 포장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반면 보수 세력의 지지로 당선된 전직 대통령은 ‘왜 보수인가’를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고, 상식 밖의 행태까지 보여 몰락을 자초했으며 보수 정치인들은 이전투구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진보 진영 대통령 후보와 유력 정치인이 “보수를 궤멸하자”고 말하고 ‘보수=부패’ ‘진보=청렴’ 프레임을 씌워도 보수 진영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을 뿐이다.

보수는 설 땅이 없는가. 정반대다.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유럽의 진보 진영은 ‘제3의 길’을 표방하면서 진보 노선을 희석해 보수화됐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한반도 주변 4강은 ‘국익 우선’을 내세우며 보수 노선을 더 강화하고 있다. 진보가 중시하는 결과 평등주의와 정부의 개입 확대는 세계화와 기술혁신 때문에 현실성을 잃어가고 고(高)실업사회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반면 금융위기나 테러에 의한 안보위협 등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역풍으로 민족주의를 토대로 하는 강력한 국가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와중에 결과 평등주의의 한계로 입지가 좁아진 한국의 진보 진영은 지역주의와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묘수’로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다.

한국은 세계사적 흐름에 역행하고 보수 진영은 길을 잃어 헤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보수 진영 학자들이 모여 《오래된 새로운 비전》과 《오래된 새로운 전략》을 내놓아 주목받고 있다. 한국은 나라 밖으로는 북의 핵 위협에다 중국, 일본과의 갈등이 더해지고 안으로는 성장잠재력과 중산층이 약화되는 내우외환에 봉착하고 있다. 진보 진영이 내세우는 민족주의적 대북 정책은 물론 결과 평등주의적인 경제사회정책의 허상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보수 진영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국민의 신뢰를 너무 잃었기 때문에 신보수의 등장과 해결책이 자연스럽게 관심을 끌게 된다.

보수 운동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보수는 자신이 행복을 만들고 진보는 사회가 행복을 만든다고 믿는다. 전 세계 사람을 대상으로 가치관과 행복의 관계를 조사하면 보수적인 사람이 진보적인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느낀다. 또 정부 규제와 신뢰의 관계도 규제가 많은 나라일수록 신뢰가 떨어진다. 불신은 규제를 만들고 정부 간섭은 사람들의 신뢰와 협력을 저해하며 결국 개인 행복을 침해한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열심히 하면 보상받고 이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신뢰를 높이자는 보수의 가치는 인간의 행복추구 본능에 부합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혼란에 빠진 보수의 정체성은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한국에선 독특하게도 소득불평등 확대 등의 이유로 신자유주의는 무조건 비판받는 반면 경제민주화와 사회적 시장경제는 이름만으로도 인기를 끈다. 개혁을 표방하는 보수 정치인들이 덩달아 경제민주화와 사회적 시장경제를 강조하면서 보수의 정체성이 더 흔들렸다.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은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부유층의 과도한 행복추구, 즉 탐욕을 견제하는 데 결점이 있다고 보고 금융질서 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반면 한국은 신자유주의가 강세였던 때도 미국과 달리 대기업과 비정규직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소득불평등만 커졌다.

경제민주화나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해석의 오류가 범람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민주화’나 ‘사회적’이라는 용어에 끌리고 있다. 두 제도의 원조 격인 독일은 ‘민주화’의 방점을 시장 주체의 참여와 권리 및 책임 강화에 두고 있고 ‘사회적’의 방점은 정부 간섭을 배제하고 사회의 힘 있는 주체들의 자발적인 협력에 찍고 있다. 이는 독일이 경제성장과 소득평등을 지속할 수 있는 저력이 된다. 반면 한국은 경제민주화와 사회적 시장경제를 경제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논리나 결과 평등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한다. 이 바람에 가뜩이나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는 한국 경제가 기사회생의 마지막 기력조차 잃을까 우려된다.

김태기 < 단국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