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후진국으로 가는 인프라 투자
세계 4대 연기금인 국민연금은 올해 들어 영국과 호주에서 대형 인프라 투자 두 건을 성사시켰다. 지난 7월 영국 투자회사들과 컨소시엄을 이뤄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국제 특급열차 유로스타의 영국 내 선로(하이스피드1) 운영권을 따냈다. 9월에는 시드니를 포함한 호주 남동부 뉴사우스웨일스주 100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하는 전력회사 인데버에너지의 지분 1000억원어치를 인수하기로 했다.

영국과 호주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기관투자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프라 투자처다. 국민연금은 작년에도 호주 최대 항구인 멜버른항구의 50년 운영권을 호주 국부펀드인 퓨처펀드, 호주 퀸즐랜드주투자청(QIC), 중국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 등과 함께 사들였다.

세계 ‘큰손’들이 유독 영국과 호주 인프라에 투자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부가 사회간접자본(SOC)을 개발하거나 현대화하는 데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매력적인 투자 기회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예측 가능성’이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인프라를 민간 투자의 대상으로 개발한 나라다. 인프라 투자에 대한 규제 제도가 잘 갖춰져 있고,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영국 연방인 호주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국내 투자업계 관계자는 “무엇보다 계약 이행을 중시하는 게 영국과 호주에 안심하고 투자하는 이유”라며 “영국에서도 5년마다 금리 변화 등을 감안해 투자 수익률을 조정하지만 미리 정해진 공식이 있어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은 어떨까? 국민연금은 7월 국내 인프라에 투자하는 ‘그린펀드’ 위탁운용사를 선정한다고 공고하면서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에 근거해 수행되는 민자사업은 제외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공고문의 주석 한 줄에 불과했지만 인프라 투자업계가 느낀 충격은 컸다. 사정은 이렇다. 전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최근 발의한 ‘유료도로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중대한 사정 변경이나 부당행위로 인한 사유가 발생할 경우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에 따른 실시협약, 즉 계약 변경을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민자도로의 통행료가 비싸다는 민원을 해결하겠다는 법안이다.

국민연금은 2006년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 북부구간 사업에 투자한 이후 ‘통행료가 비싸졌다’는 비난을 10년째 받고 있다. 연 금리 65%의 후순위채에 투자한 결과다. 유료도로와 같은 인프라 사업은 현금은 발생하지만 감가상각비 때문에 손익계산서상 적자 상태가 지속돼 배당금을 가져올 수 없다. 후순위채는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가 현금을 가져나오기 위한 기술적 방법일 뿐이다. 국민연금은 지분과 선순위대출을 포함해 전체적으로는 연 7%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국회의원들은 국정감사 시즌만 되면 국민연금을 ‘고리대금업자’로 몰아붙이고 있다. 표심 때문이다. 이번에는 급기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을 바꿀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섰고, 국민연금은 언제라도 계약이 바뀔 수 있는 사업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한 셈이다.

한국은 세계은행이 조사하는 ‘기업환경지수’에서 ‘계약 집행력’ 분야 1위 국가다. 마음놓고 투자하고 사업할 수 있도록 법조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가 수십 년간 땀흘리며 가꿔온 결과물이다. 일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치인이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후진국으로 되돌리고 있다.

유창재 증권부 차장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