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한산대첩 비결
임진왜란 20일 만에 한양을 잃고 두 달 만에 평양을 빼앗겼다. 조총을 앞세운 왜군 앞에서 관군은 맥을 못 췄다. 곳곳에서 의병이 들고일어났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사이 선조는 의주로 도망갔다. 침략 계획을 미리 알고도 당파싸움만 일삼다 기습을 당했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육전의 참패와 달리 해전에서는 연전연승이었다. 1년 전부터 군선과 무기를 정비한 이순신이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합포·적진포·사천·당포·율포 등에서 잇단 승전보를 올렸다. 결정적인 승리는 한산대첩이었다. 이 전투로 제해권을 장악해 적의 서해 진입을 막고 호남 곡창지대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후방수송로가 끊긴 적은 결국 평양에서 후퇴해야 했다.

이순신이 전선 56척을 이끌고 당포(통영 삼덕)에 닿은 날은 1592년 8월13일. 그날 저녁 김천손이라는 목동이 헐레벌떡 뛰어와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거제 덕호)에 닿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50리(20㎞) 길을 쉬지 않고 달려 첩보를 전한 김천손 덕분에 이순신은 작전계획을 미리 짜고 준비도 철저하게 할 수 있었다.

다음날 이순신은 주력함대를 한산도 앞바다에 배치하고 판옥선 몇 척으로 견내량의 왜군을 유인했다. 해역이 좁고 암초가 많은 견내량보다 넓은 바다에서 싸우기 위한 전략이었다. 왜군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판옥선들이 삽시간에 방향을 바꿨다. 대기하고 있던 함선들이 학의 날개처럼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왜선을 포위했다. 이순신의 발포 명령이 떨어지자 거북선을 비롯한 전 함대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이 전투로 왜선 73척 중 49척을 격파하고 12척을 나포했다. 아군 피해는 한 척도 없었다. 이틀 후 안골포(진해 웅동)에서도 42척을 전멸시켰다. 이로써 왜군의 ‘수륙병진계획’을 완전히 꺾고,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 육군에 용기를 줬다. 행주대첩,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대첩으로 불리는 쾌거였다.

해군 전략가들은 한산대첩의 비결을 세 가지로 꼽는다. 지형적 특성을 잘 살린 전략과 학익진의 포위 전술, 거북선과 대포 등의 첨단 무기, 김천손의 제보 등을 활용한 정보력이 그것이다. 방향 전환이 쉬운 판옥선의 ‘회전포격’으로 대포 장전 시간을 줄이고, 왜군이 배에 오르는 걸 차단함으로써 아군 피해를 최소화한 것도 한몫했다. 서양이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으로 평가할 만했다.

올해도 한산대첩축제가 15일까지 계속된다. 해상전투 재연 등 볼거리도 많지만, 425년 전 그날의 호국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면 더 좋겠다. ‘호을로 지킴이여/ 눈물이 겨웁도다/ 한산섬 큰 싸움이여/ 꿈속에도 서리도다’는 노산 이은상의 한산대첩비문도 함께 읽어볼 일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