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자생적 질서 덕에 시장경제 발전했다"
“자유는 의지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힘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머물러 있기를 선택하면 머물 수 있고, 움직이기를 선택한다면 움직일 수 있다. 이런 자유는 죄인이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인간 행위에는 어떤 민족에도, 어떤 세대에도 들어맞는 크나큰 제일성(齊一性·uniformity)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인간 본성은 그 원리나 작용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동일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같은 동기는 항상 같은 행위를 산출한다.”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1776)은 대표작 《인간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과 《인간지성에 관한 탐구》를 통해 인간 본성을 집중 고찰했다.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위 주체인 인간 본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흄은 경험주의 철학을 토대로 진화론적 자유주의를 주창했다. 또 개입주의와 설계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법사상, 나아가 법치주의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계획된 질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다시 읽는 명저] "자생적 질서 덕에 시장경제 발전했다"
흄은 친구인 애덤 스미스 등과 함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다. 진화론적 합리주의가 핵심 사상이다. 시장경제만 하더라도 특수한 사회 계층이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들의 다양한 활동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결과라고 봤다. 이기적 목적을 추구하는 범인(凡人)들의 행동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상업사회의 도덕이 생겨났고 물질적 번영도 이뤘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인간의 탐욕은 모든 시대, 장소에서 작용하는 보편적 감정이지만, 이런 탐욕이 미치는 사회적 결과는 제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흄의 이 같은 사상은 데카르트와 홉스, 벤담 등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계몽주의와는 확연히 궤를 달리한다. 프랑스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구성주의적 합리주의를 주창하지만,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구성주의나 인위적 질서를 배격한다. 개인들이 타인의 인격과 재산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의무를 강조할 뿐이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또 미래를 미리 정하지 않는다. 자생적 질서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미래를 열어놓고 있다. 20세기 이후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은 하이에크 등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데카르트의 프랑스 계몽주의는 케인스 등이 이어받았다.

흄은 자유사회의 기초가 되는 세 가지 행동 규칙으로 사적 소유의 원칙과 계약 자유의 원칙, 약속 이행의 원칙을 꼽았다. 또 《도덕·정치·경제논집》에서 시민의 자유를 말하면서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를 강조했다. 흄의 이 같은 생각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 사상이 자리잡는 데 개척자 역할을 했다.

자유주의의 법치주의 정신은 흄이 말한 ‘법의 지배’와 다르지 않다. 흄은 “실제로는 잘못된 공준(公準)이 정치에서는 참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늘 정부를 경계하고 모든 자의적 권력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내용이 무엇이든 ‘법’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법치주의 정신은 이처럼 의회가 만든 실정법(實定法)이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법실증주의와 분명히 다르다.

‘인간의 지배’ 아닌 ‘법의 지배’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법다운 법’을 위한 요건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행동규칙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개인이나 기관의 특정한 사정이나 특수한 장소 및 시점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특별한 목적이나 동기를 내포하지 않는, 추상성을 갖춰야 한다. 달리 얘기하면 개인 인격과 재산 침해 등 특정 행동을 금지하는 내용이면 충분하다.

요즘 입법자들이 정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법이고, 이에 따르는 걸 ‘법치’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하지만 개인 자유를 억누르고, 권력자 간섭을 정당화하는 법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인간이 아니라 법의 지배를 강조한 흄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수언 논설위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