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데스크 시각] 한국의 첫 '간섭주의' 정부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 정치가’ 로베스피에르는 권좌에 앉자마자 ‘생필품 최고가격제’를 시행했다. 초법적 시장 간섭도 불사하는 ‘서민 대변자’의 출현에 대중은 열광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가격은 폭등했다. ‘밑진다’며 업자들이 생산을 줄였기 때문이다. 열광은 금세 분노로 바뀌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인민의 적’으로 몰려 단두대로 갔다. 성난 군중은 실려가는 그에게 “저기 비열한 ‘최고가격제’가 간다”고 비난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한 달여.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간섭주의’라는 유령이다. 문 정부는 ‘3기 민주정부’이자 ‘진보정부’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태에서는 민주나 진보가 아니라 간섭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민주·진보 적고, 간섭만 넘쳐

간섭주의는 개입과 규제로 국가 목표를 달성하려는 통치 방식이다. 임금 이윤 투자 세금 인플레이션 등 모든 것이 간섭 대상이다. 새 정부는 출범 첫날부터 ‘간섭본색’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인천공항을 찾아가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며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다. 수십 년 묵은 노동시장의 난제는 어떠한 조율도, 설득 과정도 없이 그 한마디에 결판나 버렸다. 반론은 허락되지 않는다. 다른 해법을 말한 경총은 ‘적폐’로 몰려 반성문을 썼다.

통신기본료, 공무원 증원, 최저임금, 검찰개혁 등의 이슈에서도 월권적 밀어붙이기가 차고 넘친다. ‘국민의 명령’이니 따르라는 식이다. 대통령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만들어 기업별로 점검하는 복고 취향도 선보였다.

간섭주의는 ‘더 큰 정부가 주도하는 더 많은 행동이 정의이자 진보’라고 강조한다. 정부의 지혜가 시장보다 우월하다는 전제다. 평등을 명분으로 자유의 축소를 정당화한다. 최소한의 ‘정의의 시스템’ 유지를 정부 의무로 상정하는 자유주의와는 대조적이다.

한국은 여태껏 간섭주의 무풍지대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간간이 간섭적 색채를 드러냈지만, 그 시절도 ‘시장중심 자유주의’가 압도했다. 두 대통령은 지지자들로부터 ‘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간섭의 끝은 '모두의 빈곤'일 뿐

새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계승하겠노라 말해 왔다. 하지만 행보는 딴판이다. 일종의 금기였던 민간기업에 대한 노골적 개입에도 눈치보거나 주저함이 없다. ‘압박을 느낄 땐 느껴야 한다’며 아예 협박조다. 정의와 진리를 독점한 듯하다. ‘87체제’ 이후로는 경험도 상상도 해보지 못한 낯선 권력인지라 이해조차 쉽지 않다. 간섭주의는 기업을 ‘사악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빈곤을 ‘사악한 사회제도의 결과’로 인식한다는 60여 년 전 미제스의 탁견을 접하고서야 무릎을 치게 된다.

간섭 정책으로 성공한 나라는 없다. 20세기 초 영국 경제가 미국에 따라잡히며 제국에서 밀려난 것은 ‘사회적 자유주의’ 등 간섭주의적 열기에 포획된 탓이 컸다. 스웨덴도 간섭주의를 도입한 1950년께부터 줄잡아 50년 가까이 경기 부진에 시달렸다. 결국 스웨덴은 새 밀레니엄을 전후해 자유시장주의로 복귀하며 정상궤도에 재진입했다. 20세기 전반 한때를 풍미한 간섭주의는 낡은 시대의 유물이다. 프랑스가 ‘초짜’ 마크롱을 선택한 것도 뿌리 깊은 간섭주의적 전통과의 결별 선언이다.

간섭주의는 따뜻한 자본주의, 경제민주주의 같은 그럴듯한 구호를 앞세운다. ‘모두에게 밥을, 실패자에게 기회를’ 약속한다. 그러나 종착지는 언제나 ‘모두의 빈곤’이었을 뿐이다. ‘큰 정부’의 독선이야말로 시대착오적 적폐다.

백광엽 지식사회부장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