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정쟁 수단으로 전락한 '추경 근거법'
정부가 11조2000억원의 일자리 중심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7일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청년구직난 등을 감안해 추경안을 이달 임시국회에서 조속히 처리하자는 입장이지만 국회 통과는 험로가 예상된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일제히 추경안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공무원 1만2000명 연내 추가 채용 등 일부 추경 사업도 큰 문제지만, 본질적으로 이번 추경 자체가 국가재정법에 규정된 편성 요건에 맞지 않는다는 게 야당의 주장이다.

국가재정법 89조는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가 발생했거나, 경기침체 대량실업 같은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추경 편성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예산실은 이번 추경 요건으로 ‘대량실업 발생 우려’를 제시했다. 예산실 고위관계자는 “몇 년째 월별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청년구직난이 심각한 상황은 대량실업 발생 우려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야당과 상당수 재정학자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올 들어 수출 생산 투자 내수가 일제히 회복세를 보이고 증시·부동산시장도 상승하고 있어 대량실업을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치권이 재정건전성 강화 등을 위해 2006년 12월 국가재정법을 제정한 이후 대부분 추경안은 크건 작건 ‘89조 편성 요건 불충족 논란’을 야기했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 6월 고유가·고물가 경감 대책을 담은 4조6000억원의 추경안을 내놨을 때 당시 야당은 “고유가는 국가재정법 요건에 위배된다”며 거세게 반대했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 직후인 2013년 4월 “1% 미만의 분기 저성장이 2년간 지속돼 ‘경기침체 발생 우려’에 해당한다”며 추경안을 제출했지만 야당은 “플러스 성장을 경기침체로 볼 수 없다”며 반대한 적도 있다. 2015년 추경 때도 태풍 등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재해’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발발이 편성 요건에 포함된 것을 놓고도 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렇다고 편성 요건 결여 논란을 빚은 추경안이 국회 통과에 실패한 사례는 지금껏 한 번도 없다. 여당이 서민·민생 경제 안정 등을 내세우며 국정 발목을 잡지 말라고 압박하면 야당은 여론의 부담을 느끼다가 결국 몇몇 예산사업만 ‘칼질’하고 추경안을 통과시켜주는 행태가 되풀이됐다. 여당과 야당이 바뀌었을 뿐 이번 추경안도 결국엔 비슷한 경로를 밟으며 국회 문턱을 넘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추경안이 그렇게 통과된다면 정치권은 국가재정법 89조 개정 논의도 함께 해보면 어떨까 싶다. 엄격하게 지키지도 않으면서 정치 논란의 ‘빌미’만 계속 제공하고 때때로 상대당 공격 수단으로 활용되는 법 조항을 언제까지 그대로 놔둘 순 없다.

국가재정법 89조는 제정 직후부터 “헌법(56조)은 정부의 추경 편성 권한을 폭넓게 부여하는데 하위법(국가재정법)이 그 요건을 제한해 위헌 소지가 있다”(이석연 전 법제처장)는 비판을 받았다.

경제·사회 환경은 급변하는데 시행령도 아닌 법에 추경 요건을 일일이 열거해 놓은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란 견해도 많다.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이 환경 변화와 세수 등을 반영해 더 탄력적으로 추경을 편성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는 것이 어떨까.

이상열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