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완 칼럼] 나라를 나라답게, 정책도 정책답게
문재인 대통령 취임 한 달이 돼간다. 문 대통령은 역사의 변곡점에서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선진국 진입에 꼭 필요한 구조개혁을 이뤄야 할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다. 문 대통령이 혜안과 열정, 도량으로 “나라를 나라답게” 바꾸기를 기대한다. 그러자면 “정책도 정책답게” 치밀하게 벼려야 할 것이다.

미국 학계에선 지난해 미 대선의 진정한 패배자는 클린턴 후보가 아니라 ‘국민과 정책’이라고 탄식했다. 박빙의 승부를 펼치던 두 정당이 지나치게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공약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진행됐던 영국의 국민투표도 유럽연합(EU) 탈퇴로 귀결되고 말았다.

지난 5월 프랑스 대선으로 제동이 걸렸지만, 학자들은 이처럼 최근 각국에서 나쁜 정책을 양산하는 주범이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과신이라고 진단한다. 유권자는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사안엔 ‘합리적으로 무관심’하고, 이해가 얽히면 ‘불합리한 편견’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파나 이익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전문가의 관여와 중재가 활성화돼야 민주주의의 ‘책임성’과 ‘대표성’ ‘포용성’을 확보할 수 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조너선 라우치와 벤저민 위티스가 며칠 전 발표한 논문의 결론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탄핵 정국에다 촉박한 보궐선거 일정까지 겹친 탓인지 19대 대선에선 날림·부실 공약들이 넘쳐났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을 제외하면 정당들의 대선 공약을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우리 역시 지난 대선의 최대 피해자는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새 정부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5개 정당의 공통공약 44개를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반영해 우선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야당들도 엇비슷한 대증요법이나 땜질 처방을 약속한 원죄가 있는 만큼 이들 공통공약은 엄격한 검증 없이 일사천리로 추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돼선 안 된다. 이상에 치우치거나 표심을 겨냥했던 선심성 공약들은 과감하게 가지를 쳐야 한다.

특히 아직 고위직 인선이 끝나지 않은 정권 초기에 주요 국정의제들에 관한 대통령의 앞서가는 행보는 위험하다. 대통령이 발표하고 나면 잘못된 내용이라도 되돌리기 어렵다. 아무리 대선 공약이라고 해도 최소한 장관, 수석비서관, 위원장 등 공식 라인과는 숙의를 거듭하고 비용도 따져봐야 부작용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약속은 옳고 그름을 떠나 지난 정부 초기 근로자 정년 연장을 떠올릴 만큼 성급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좌초됐던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을 답습해선 안 된다. 노사가 첨예하게 맞선 쟁점들은 ‘풍선효과’ 때문에 가급적 함께 묶어서 타결해야 한다. 노조가 반색할 카드를 미리 써버리면 임금체계 개편이나 고용 유연화 등 나머지 쟁점의 협상 동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이미 취업한 사람이야 좋겠지만, 이번 조치로 실업자와 청년의 구직난은 악화될 게 뻔하다.

단임제 이후 새 대통령들은 기존 정책을 뒤집고 전임자 허물을 부각하는 ‘부정(否定)의 정치’로 차별화를 도모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국정 연속성과 일관성이 떨어지고 ‘영혼 없는 관료’라는 비판마저 등장했다. ‘정치검찰’이나 특수활동비 등만 적폐가 아니다. 새 정책의 출시에 앞서 정책 ‘재고조사’부터 충실히 해야 한다. 여러 전문가로부터 기존 정책의 논거와 애로, 공약의 현실 적합성과 차선책에 관해 두루 듣고, 전 정부 고위직들의 국정 경험과 노하우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초기 국정에 스며들 수 있는 ‘과잉 정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 9년’을 지우고 싶은 과욕과 많은 것을 빨리해내려는 성급함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다. ‘밀월 기간’의 덕담과 인내를 과대평가하다간 ‘승자의 저주’를 잉태할 수 있다.

박재완 < 성균관대 교수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