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피해자 프레임에 갇힌 공화국
종교인들은 종종 로버트 휴즈의 ‘불평의 문화’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피해자라고 여기며 불평하지 말라”고. 설교가 먹혀들었으면 ‘피해자의식(victimhood)’이라는 말이 사회학자의 눈을 사로잡지도 못했을 것이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피해자의식이 곳곳에서 분출한다. 온 나라가 ‘선’과 ‘악’,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으로 짝 갈라진다. 정치인이 이 틈을 놓칠 리 없다. 구세주를 자처하며 ‘공공의 적’을 지목하고 나선다. 그리곤 적개심을 고취시킨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중소기업단체협의회 앞에서 쏟아진 발언들만 해도 그렇다. “30대 재벌 사내유보금이 700조원이 넘지만 중소기업 10개 중 7개는 경영이 더욱 어려워졌다” “재벌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한 일감 몰아주기, 기술 탈취, 부당 내부거래,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으로 중소기업은 수탈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계급투쟁을 방불케 한다.

농민단체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농업을 희생해도 괜찮은 영역으로 생각했고 농민은 그런 대우를 받았다.” “농민 동의 없이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고 외국 농산물과 경쟁시키는 게 적폐다.” 여기선 개방이 적이요, 가해자다.

피해자의식을 부추기는 게 어디 이뿐인가. 부자, 기업가 등이 가해자로 설정되는 서민정책, 노동정책은 말할 것도 없다. 청년정책, 교육정책, 연구정책, 에너지정책, 산업정책, 부동산정책 등에서조차 ‘피해자-가해자 프레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피해자의식 굿판이 벌어지는 제단에 무엇이 쌓일지는 짐작하는 대로다. 가해자를 응징할 무소불위 기관, 슈퍼 규제법이 출몰한다.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을 분할할 칼자루를 쥐여주자는 게 단적인 사례다. 동시에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지 피해자를 달랠 지원 일색의 선심성 공약이 쏟아진다. 모든 분야, 모든 정책이 ‘규제’와 ‘복지’, 두 축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중소기업, 농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피해자의식이 전부 근거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중엔 마땅히 고쳐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러나 ‘선’과 ‘악’,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은 문제 해결을 더 멀어지게 할 뿐이다. 지금까지의 중소기업정책, 농업정책만 봐도 그렇다. 중소기업, 농업을 살렸는가 죽였는가. 그것도 부족한지 이젠 중소기업부 등 부처 승격이나 작명까지 굿판에 등장했다. 이건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지구상에 한국만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의식에 편승해 이득을 보는 이들은 따로 있다. 정치인, 피해자의식 몰이를 업으로 삼는 단체만이 아니다. 최대 수혜자는 자조, 자립 등과는 담을 쌓은 ‘좀비 중소기업’ ‘좀비 농민’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아니면 정치지향 중소기업이나 농민이든가.

그렇다면 피해자의식 문화가 만연할수록 진짜 피해자는 누구이겠나. 정치인이나 이해단체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중소기업, 농민을 전체주의적, 파쇼적 집단으로 묶으려 든다. 하지만 개별주체로는 천차만별이다. 이들을 동질적 집단화한 것 자체가 이미 정책 실패를 예고한 것이다. 결국 자조, 자립하려는 정상 중소기업, 정상 농민만 피해를 보게 된다. 이게 현실이다. 더욱 심각한 건 그 피해가 미래로도 이어진다는 점이다.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는 망하게 할 수밖에 없는 ‘혁신’, 고통과 망각을 요구하는 ‘구조조정’ 등은 피해자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산업을 통째로 바꾼다는 4차 산업혁명은 더욱 그렇다.

정치부터 갇혀버린 ‘피해자 프레임’이다. 대선후보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희망과 기회가 충만한 나라, 개인의 자율과 창의가 넘치는 나라. 이런 공화국에서 가능하겠나.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