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더 나은 미래를 여는 용기
기상상태가 좋지 않다 걱정했더니 역시나 오전 비행기가 줄줄이 연착됐다. 뜨지 못한 비행기들로 인해 기상상태에 문제가 없는 시간대 비행기까지 한참 후로 밀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공항 로비에 앉아 TV를 보는데 요즘은 어딜 가도 대선에 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대선 토론회에 나온 후보들은 제각기 더 나은 미래를 펼치기 위한 공약을 내놓고 설명하느라 바쁘다. 과거에 비해서는 훨씬 편해지고 풍요로운 나라가 됐는데, 아직 사회구성원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그다지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사회 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불합리 때문에 개인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시간 똑같은 강도의 노동을 하고서도 동일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 출발선부터 불리하게 시작해 아무리 노력해도 경쟁에서 앞서기 어려운 젊은이들, 여러 사회적 금기에 의해 자신의 꿈을 접어야 하는 사람들…. 사회 불합리에서 비롯되는 이런 문제들은 참으로 안타깝지만 대선후보 어느 누구도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고질적인 불합리를 깨는 것은 이름 모를 어느 개인의 용기 있는 행동에서 시작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혹은 주변의 만류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낸 사람은 위대하다.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무모하게 여겨지는 일을 시도해 역사상 최초의 개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 최초의 행동으로 바위처럼 좀처럼 변할 줄 모르는 불합리한 사고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한 번 생긴 균열은 점차 틈새가 벌어지기 마련이고, 마침내 견고하고 큰 바위는 갈라지고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만인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틀림없이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시도된, 모두가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어느 최초의 순간이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 18일 열린 12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일흔 살의 여성 마라톤 선수가 수많은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녀의 이름은 캐서린 스위처, 50년 전 스무 살의 나이에 이 대회에 참가해 풀코스를 완주한 최초의 여성이다. 그녀를 향한 환호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50년 전인 1967년에만 해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여성이 참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여자는 출산을 위한 신체구조상 달리기를 하면 좋지 않다는 항간의 낭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위처는 금기를 깨고 대회에 참가했다. 3㎞쯤 달렸을 때 여성이 참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대회 감독이 그녀를 끌어내려고 몸싸움을 벌이는 등 수차례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풀코스를 완주해냈다. 그 최초의 순간으로 인해 향후 마라톤 대회에서 여성의 참가가 가능해졌음은 물론 여성의 신체는 격한 운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고정관념도 깨졌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노년이 된 그녀이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는 젊은이를 능가했고 자신이 이룩해 낸 ‘미래’인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후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후 기장의 안내멘트가 들려왔는데 기상상태와 목적지까지의 거리, 그리고 도착 예정시간을 가벼운 유머를 섞어 전달하는 목소리가 왠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항상 들어오던 굵직한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아니라 틀림없는 여자 기장의 목소리였다. 파일럿은 남자만 할 수 있는 줄 알았고 어쩌면 남자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내게 여자 기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놀랍고도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개인을 옭아매는 불합리한 금기는 누군가의 도전에 의해 그리고 그 도전의 가치를 인정하는 많은 지지자에 의해 결국은 깨지게 돼 있다. 한 세기에 어렵게 만들어진 철학이 다음 세기에는 상식이 되는 것처럼 오늘의 용기 있는 시도는 더 나은 내일을 향한 문을 열어 놓을 것이다. 낯설고 놀라운 일을 만나는 날이 자주 있기를 바란다.


이주은 < 건국대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