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말과 감정의 힘'을 믿기 시작했을 때
정신과 의사는 두말할 나위 없이 특이한 직업이다. 냉정함을 고도로 요구하는 의사라는 직업 중에서도 감정을 다루고 환자에게 공감해야 하는 모순된 면을 지닌다. 동시에 아직도 먼 우주나 깊은 바닷속처럼 미지의 세계로 여겨지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을 살펴보는 만큼 이런 특이한 직업은 아마도 정신과 의사 외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간혹 어떤 이는 정신과 의사를 점쟁이나 마술사처럼 신비롭게 여기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기꾼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만큼 오해도 많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직업이라는 이야기다. 그 때문인지 종종 어떻게 정신과 의사가 됐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가벼운 물음일 때는 대충 이야기하고 넘어가지만 진지하게 물어오는 사람에게는 “말과 감정의 힘을 믿기 시작했을 때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보면 그 믿음을 갖기까지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중 하나는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있을 때 일이다. 일반의(비전문의) 군의관이어서 병원이 아니라 구축함 내 의무실에서 근무했는데 한 번 항해를 나가면 적어도 2주 이상 바다에서 지내던 때였다. 주로 환절기에 감기 몸살 환자가 많아 체온을 재는 일이 잦았다. 당시 군에서는 수은이 들어 있는 유리 체온계를 썼는데 내구성이 좋지 않아 쉽게 부러졌고 결국 한두 개 남았을 때부터는 궁여지책으로 손으로 열을 재기 시작했다.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는 상황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몇 번 하다 보니 나중에는 손으로도 상당히 정확하게 열을 잴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비슷한 정도의 환자인 경우, 체온계로 열을 잴 때보다 손으로 열을 잴 때 더 빨리 환자가 회복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대화가 더 많이 오갔고 자연스럽게 격려나 위로의 말을 더 하게 된 것 같다. 또 손으로 이마의 열을 재는 과정에서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도 같이 받았을 것 같다. 어쨌든 손으로 열을 재는 과정이 더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당시 인턴을 갓 마친, 경험이 적은 의사였던 나에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고 당시 경험은 결국 한 명의 정신과 의사를 만든 개인적으로 중요한 경험이었다.

정신과 의사란 이런 ‘말과 감정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이 힘을 통해 치료를 이어나가기도 하고 때때로 말과 감정의 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설파하기도 한다. 하지만 ‘말과 감정의 힘’이 긍정적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성급한 조언이나 부적절한 감정 개입은 상대방에게 상처가 된다. 가령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상심한 사람에게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조언이라기보다 폭언에 가까우며 이는 크든 작든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일반인도 이런 부적절한 언행은 문제가 되지만 정신과 의사의 경우 객관성이나 전문성, 학문적 권위를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 피해는 훨씬 커진다. 바꿔 말하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할 수 있고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한 공간이나 방송에서는 좀 더 신중한 언행이 요구된다.

사회·정치적 이슈가 많아지면서 특정인의 심리나 성격에 대해 대중의 궁금증이 늘어났다. 이에 발맞춰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들이 방송이나 신문에서 심리나 성격에 관해 이야기하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되는데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명확한 근거 없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신문 기사나 방송으로만 접한 사람의 심리상태나 성격, 나아가 정신의학적인 진단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얼핏 그럴싸해 보일 수는 있으나 대부분 근거가 빈약한 추측에 불과하다. 이런 추측을 방송 매체에서 정신과 의사가 이야기하면 주변 사람에게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믿게 하는 부작용을 낳고 전체 정신과 의사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말과 감정의 힘’은 한두 사람이 독점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만일 그런 시도가 반복될 경우에는 사회적인 비난까지 초래하게 된다.

강병훈 < 서울연마음클리닉 원장, 정신과·소아정신과 전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