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퀄컴은 한국이 우스운가
“도널드 트럼프는 혁신에 재앙이 될 것”이라며 반(反)트럼프 성명을 냈던 실리콘밸리 인사 145명 중에는 어윈 제이컵스 퀄컴 공동창업자, 폴 제이컵스 퀄컴 회장도 있었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해 정상적 경쟁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1조300억원의 과징금 부과와 함께 시정명령을 받은 퀄컴이 지금쯤 트럼프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퀄컴이 로비전에 나선 모양이다. “한국 공정위가 우리의 특허 라이선스 수익모델을 부정했다” “중국 공정위는 과징금만 때렸지 우리의 수익모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한국 공정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절차를 위반했다”는 등. 쉽게 풀어 말하면 이런 뜻이다. “한국 공정위는 특허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가득 찼다” “중국과는 협상을 통해 풀었다” “여차하면 한국을 (그렇지 않아도 트럼프가 삐딱하게 보고 있는) 한·미 FTA 협정 위반으로 걸어 통상 이슈로 끌고 가겠다.”

한국의 무지와 오해 탓?

여기서 한국은 퀄컴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또 퀄컴은 한국이 이동통신산업을 발전시키기까지 얼마나 기여했느냐고 서로에게 말해 봐야 구차스러울 뿐이다. 퀄컴이 중국과 뒷거래를 하든, 한·미 간 통상이슈로 몰고 가든 그건 퀄컴의 자유다. 하지만 퀄컴이 한국을 특허 수익모델을 부정하는 국가라고 비난하는 건 이와는 다른 문제다.

퀄컴이 어떤 회사인가. 해당 특허를 침해하지 않고선 제품을 생산·판매·서비스하기 힘든 이른바 표준특허의 세계적 강자다. 그것도 스마트폰과 관련한 표준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니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높은 기술력을 자랑하는 퀄컴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데 시비를 걸 나라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한국 공정위가 문제 삼은 것은 어디까지나 퀄컴이 모든 사업자에게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으로 특허를 제공할 것(이른바 FRAND)을 확약한 대가로 표준특허 지위를 얻어놓고 이를 어겼다는 점이다. 퀄컴이 약속과 달리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칩셋의 제조 및 판매에 필요한 표준특허 라이선스 제공을 거절하거나 제한했고, 자신들의 칩셋 공급을 볼모로 부당한 라이선스 계약 체결을 강요했다는 혐의다.

누가 특허제도를 흔드나

그동안 퀄컴을 비롯한 표준특허 강자들은 늘 자신들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탓해 왔다. “표준특허권자가 경쟁자의 시장진입을 방해하려고 특허 사용을 거절하거나 과도한 로열티를 요구한다지만 확인된 바 없다. 이른바 ‘특허 억류행위(hold-up)’는 없다” “FRAND 원칙이 망가졌다지만 균형 있게 작동하고 있다”는 등. 한국 공정위의 주장이 맞다면 이거야말로 거짓이 되고 만다. 퀄컴의 합당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하드웨어와 관계가 먼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 중에는 ‘특허무용론’을 퍼뜨리며 무임승차하려는 세력도 있다. 그러나 특허제도를 흔드는 건 이들만이 아니다. 오로지 소송 위협으로 먹고사는 일부 빗나간 특허괴물(정상적 특허관리전문회사도 있지만), 또 이들과 은밀히 거래하는 기업도 문제다. 특허제도가 변호사를 위해 만든 거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데 이들만 비난받을 게 아니었다. 표준특허 최대 수혜자인 퀄컴이 마땅히 지켜야 할 약속을 깼다면 이 또한 특허제도에 대한 회의감을 부추기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