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왜 모조리 미제인가
기계는 인간 능력의 연장(extension)이다. 처음에는 근육의 힘과 정밀성을 확장한다. 망치와 스패너, 자동차와 항공기, 컴퓨터와 전자제품 등의 도구들이 그렇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막 끝난 ‘CES 2017’은 인간 근육의 능력이 아니라 감각을 연장하는 보다 복잡한 기계들을 보여준다. 정밀 센서들이 연결되면서 인간 감각과 판단이 재구성된다. 육체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은 필시 정신의 자유까지 감각하게 만든다.

물질의 구속과 결핍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자는 극소수요, 그것도 일시적 자기기만이다. 마음의 연장이며 감정의 확장인 그런 기계들이 이제 인간 앞에 등장한다. 말하는 인공지능(AI) 비서 알렉사가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몇 년 후면 사람과 마음의 반응까지 일으키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근육으로부터 마음으로, 감각에서 감정으로 옮아가는 기계는 마음은 무엇이며, 마음의 주인공은 누구인지를 묻는 새로운 무신론과 유물론의 시대로 우리를 안내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미제(美製)다. 시간이 갈수록 유럽은 떨어지고 미제가 지배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전화기 축음기 전력 백열전구 모델T 비행기는 모두 미제였다. 텔레비전 원자로 전자레인지도 그랬다. 로봇 X선촬영기 MRI 노트북 이메일 인터넷도 미제다. 급기야 아이폰 아이패드 드론 사물인터넷 AI로까지 진화해온 이 모든 것의 대부분도 미제다. 미국도 처음에는 유럽을 베꼈다. 토머스 제퍼슨은 “인간의 지식은 높이 내걸린 등잔불과 같아서 그 불을 조금 옮겨 붙인다고 줄어들지 않는다”며 익살을 떨었다. 미국은 정략적 이민을 통해 지식을 통째로 수입했고 영국 독일 프랑스와 싸웠다.

인류를 재미있고 즐겁게 해준 물건은 왜 대부분 미제인가. 이 질문은 너무도 중요하다. 미국의 작년 노벨상 수상자 6명은 모두 이민자 출신이다. 2000년 이후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78명 중 38명이 역시 이민자다. 미국은 사업가도 빨아들인다. 중소기업과 기술창업자의 30%가 이민자다.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러시아)도,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남아프리카공화국)도 이민자다. 이 비율은 실리콘밸리로 가면 더욱 높아진다. 이곳에선 모두 1만4500개의 벤처가 미친 듯 일하고 있는데 이 미친 인간들의 37%가 외국 출생이다. 1.5세대 혹은 2세대를 합치면 50%를 훌쩍 넘어설 것이다. 백인 35%, 아시안 32%, 중남미 26% 등이다.

이미 고인이 된 셰일혁명의 주인공 조지 미첼은 그리스 출신이다. 그가 그리스에 남았더라면 줄어드는 연금에 항의하면서 늙은 데모꾼으로 살았을 것이다. 머스크도 브린도 고국에서였다면 기껏 강하고 약한 보드카 타령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복지천국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스웨덴인들은 본국보다 평균 40% 정도 더 부자다. 이는 다른 국가 출신들에서도 공통적으로 관찰된다. 미국인이 되면 왜 더 잘살게 되나.

진실은 간단하다. 한국인들이 잊고 사는 가치, 즉 ‘경제할 자유’가 확고하게 보장된다. 경제할 자유는 창조할 자유와 정확하게 같다. 거의 모든 재산권이 보호되며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무한정의 권리, 즉 물질주의가 관철된다. 가치를 독점하는 독재자도 없고 규제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당 간부도 없다. 무엇보다 대중의 질시와 감시를 받지 않아도 좋다. 광물 재산권을 가장 완벽하게 보장하는 나라였기에 미첼은 미치도록 셰일가스 개발에 매달렸다. 머리가 좀 돌아간다 하는 야망의 젊은이들은 그 때문에 미국으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간다.

그런 젊은이들이 한군데 모여서 형성하는 지식 생태계는 2차 네트워크 효과를 만들어낸다. 바로 집중의 효과다. 도시는 집중이며 지식의 교환 체제다. 그러나 한국의 시장(市長)들은 오히려 농촌을 그리워한다. 어린아이들에게 정치나 가르치고, 거짓 역사나 가르치며, 기업을 욕하도록 만들고, 폐쇄적 민족주의와 평등을 가르치는 한국에서 무슨 지식이 나오고 문명이 나오겠는가. 더구나 그들은 도시와 물질을 증오하도록 키워진다. 바보들은 그것을 시대정신이라고 부른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