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외교관 추방
각국 정부가 상대의 첩보활동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은 1860년대 이후였다. 대사관에 무관(武官)이 생기면서부터 외교관과 스파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군사 정보의 상호 교환은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됐다. 특별한 문제가 아니면 활동상을 알고도 묵인했다.

정보 요원은 크게 ‘화이트’와 ‘블랙’으로 나뉜다. 화이트 요원은 상대국에 공식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되는 무관이나 정보기관원. 이른바 ‘공인 스파이’다. 물론 이들의 활동에는 제약이 따르지만, 외교관 신분이기 때문에 위법이 드러나도 면책특권 덕분에 기소되지 않는다. 블랙 요원은 신분을 감춘 채 암약하는 비밀 스파이다. 공식적인 신분이 없어 적발되면 간첩 혐의로 기소된다.

정치적으로 ‘거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대부분 화이트 요원이다. 이들은 기소되지 않는 대신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기피인물)로 찍힌다. ‘기피 인물’은 주재국으로부터 신임을 거부당한 인물이므로 아그레망(사전 동의)이 거부돼 본국으로 추방된다. 통상 72시간 안에 떠나야 한다.

각국의 첩보 전쟁이 치열한 만큼 ‘적대적 행위’에 따른 외교관 추방도 자주 일어난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6년 레이건 행정부는 옛 소련 외교관 80명을 무더기로 추방하며 대대적인 스파이 소탕전을 벌였다. 당시 작전명은 ‘오퍼레이션 패미시(Operation Famish, 아사 작전)’. 이에 대한 소련의 강력한 대응으로 양국 정보요원들이 줄줄이 짐을 싸야 했다. 1999년에는 미 국무부 청사 외곽에서 도청하던 러시아 요원이 체포돼 쫓겨났고,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의 여직원 한 명이 맞대응으로 추방됐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01년 3월엔 미국과 러시아에서 50명씩을 맞추방하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25년간 방첩업무를 맡았던 베테랑 요원이 1980년대 중반부터 변절해 러시아 스파이로 암약해온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2010년에는 오바마 미 대통령이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찾은 햄버거 가게 인근에서 스파이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지난 주말에는 오바마가 ‘미 대선개입 해킹’ 사건에 대한 보복이라며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했다. 이에 러시아 외무장관이 발끈하며 맞대응을 밝혔지만 푸틴 대통령은 “부엌싸움처럼 하지 말라”며 말렸다. 20일 후 취임하는 트럼프는 그런 푸틴을 “똑똑하다”고 칭찬했다. 국제정치의 신지형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