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한묵 선생을 떠나보내며
“붓대 들고 씩 웃으며 가야지.” 화가 한묵 선생님이 102년의 긴 삶의 여정을 끝내고 달나라로 떠나셨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 일이 가장 충격적인 일 중 하나였다고 말씀하시던 일이 엊그제 같다.

1984년 파리 퐁피두센터 커피숍에서였다. 전도유망한 27세의 청년 화가였던 나는 그 당시 다른 한국 화가들과는 달리 자유와 패기가 온몸과 마음과 목소리와 말에 실려 나오는 한묵 선생의 분위기에 경도됐다. 우리는 하염없이 그림 이야기를 하며 센 강변을 걸었다. 작가는 도시 한가운데 살며 그 시대의 공기를 호흡해야 한다던 선생은 30여년째 파리 한가운데 오페라하우스 옆 작은 집에 사셨다. 그 집 삐걱거리는 계단을 오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환갑이 넘어 늦게 결혼한 선생의 아내가 우리 어머니와 형제처럼 지내던 이충석 여사다. 선생은 세속적인 성공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자신만의 작품 세계의 완성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드물게 마음이 확 트인 분이었다. 1984년 그와 함께한 가을, 어느 순간 문득 내가 배운 건 누가 뭐라 해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침묵 속의 귀한 말이었다. 그때 인류 최초의 달 착륙에 성공한, 하지만 오래도록 고독했던 닐 암스트롱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는 위대한 약진이 될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20대를 만주에서 보낸 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다닌 한묵 선생은 고국으로 돌아온 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와 서울에 터전을 잡았다. 홍익대 교수직을 하다가 1961년 훌훌 털고 파리로 떠났던, 그때 나이 4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훌훌 파리로 떠나듯 늘 ‘붓대 들고 씩 웃으며 가고 싶다’ 하셨다는 한묵 선생은 정말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아마도 이 말은 그의 묘비명에 가장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멋진 묘비명이 또 어디 있으랴. 한국 기하학적 추상의 대부라 불리는 한묵 선생의 작품 세계는 폭발하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4차원적 세계다. 화가로서 그의 삶도 매 순간 각박한 현실을 초월하는 순간들의 집합이었으리라.

몇 년 전 선생은 99세를 기념해 젊은이도 못 따라갈 대규모 전시를 여셨다. 그분을 처음 뵌 1984년 파리에서와 똑같이, 젊을 때도 늙어서도 변함없이, 내게 그는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맑은 영혼과 어른의 너그러움을 같이 지닌 유일한 예술가다. 한 번도 화를 내는 걸 아무도 보지 못한 선생을 사람들은 ‘한묵, 대인’이라 부르곤 했다. 늘 나도 그렇게 늙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는 산책자의 삶이라고 해도 좋을까?

예술이란 결과보다는 프로세스가 아름다운 일임을, 아니 삶 자체가 그러함을 늘 일깨워주시던 선생은 기분만 좋으면 커다란 소리로 노래를 부르셨다. 그 노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니 노랫말 해독이 불가능한 행진곡 같았다. 고향인 북한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온 100세 노화가의 마음속엔 그 옛날 골목대장 시절, 꼬마들을 진두지휘하며 부르던 러시아의 혁명군가가 그대로 남아있었나 보다. 어느 먼 달나라의 노래 같은 그 신기한 노래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부르는 걸 들으며 왠지 선생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선일 것만 같았는데, 드디어 선생은 붓대 들고 씩 웃으며 이승을 떠나셨다. 왠지 그의 떠남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걸음의 시작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황주리 < 화가 >